<세계영화재단의 요청과 지원으로 복원된 <하녀>(김기영, 1960)>
「영화천국」을 닫으며
우리나라에서 필름 아카이브는 대중적이지 않았다. 아카이브의 존재와 역할을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의 수조차 많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한국영상자료원(이하 ‘자료원’)이 「영화천국」을 개간하던 2008년 즈음과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리마스터링’이라든가 ‘복원’이라는 말이 이제는 더 이상 생소하지 않다. 필름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더라도 필름이 있기 때문에 이전의 화질보다 더 좋은 디지털 영상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복원을 기다리는 사람들, 복원 영상을 보며 원본 필름의 상태를 나름대로 유추해 보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이제 자료원과 한국영화 애호가들은 「영화천국」을 졸업하고 좀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카이브 프리즘」이 그런 대화의 출발점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러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은 아카이브가 기관지를 폐간하고 창간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지난 시간을 복기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고민하는, 조금은 고통스럽고 조금은 희망적인 자기 진단의 시점이 되어야 한다.
필름을 복원하는 작업은 매 순간 공식 없는 고민과 불완전한 결론이 켜켜이 쌓여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이 단순한 단어 아래 감춰진 장황하고,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주제들을 끄집어 내지 않으면 제대로 읽어낼 수 없다. 모든 결정은 가급적 과거의 영화 창작자, 현재의 영화 애호가, 그리고 미래 세대의 불특정 다수를 ‘가급적이면 모두’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내려져야 한다. 물론 이는 불가능하므로 최선의 절충점을 찾아야 한다. 자료원의 복원 정책이 변화해 온 이력은 이 절충점을 찾고 수정하는 과정이었다. 이것은 대체로 현 세대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외피를 두르고 과거 관계자/미래 세대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해 주는 방향으로 고민해 온 흔적들이다.
1기: 위대한 필름의 시대
디지털시네마가 이 세상에 대격변을 일으키기 전의 평화로운 시대로 돌아가 보자. 필름은 영화고, 영화는 필름이었다. 필름의 촬영부터 편집, 인화, 현상, 영사, 보존까지의 모든 과정은 코닥(Kodak)사의 가이드에 따라 진행하면 됐다. 필름은 화학 입자의 덩어리들로 이루어진 필름만의 질감을 보여주었고, 색감은 필름 고유의 명암비 내에서 정해진 방식과 기준으로 조정하면 됐다. 작업이 잘 된다면 필름의 해상도는 충분히 좋았고, 보존이 잘 된다면 이론상 거의 영구적으로 보존할 수 있었다. 필름의 해상력과 안정성은 영화산업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므로 아카이브에서의 ‘복원’이란 오로지 낡아서 손상되기 쉬운 상태가 되었거나 화학적인 훼손으로 퇴색, 수축, 꼬임이 심해진 필름을 새 필름으로 인화, 현상하는 것이었다. 대체로 복원작을 공개한다고 하면, 새로 만든 상영용 프린트 필름을 영사하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아날로그 색보정, 즉 원본 필름의 컷마다의 색상별 밝기를 적정 수치로 조정하는 공정이 있고, 이 조정결과에 따라 인화 작업이 진행되므로 색상이 복원된 것도 맞거니와, 새로운 필름으로 옮겼으니 물리적 나이도 0살로 복원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필름 제국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무렵인 2006년, 우리 원은 보유하고 있던 한국 고전영화 필름의 분류 및 샘플조사를 거쳐 처음으로 세 가지의 필름 복원 프로젝트로 구성된 5개년 계획을 세웠다. 각각의 프로젝트는 60년대까지의 흑백 네거티브 필름, 80년대까지의 상영용 컬러 프린트 필름, 그리고 70년대에 만들어지고 잊혀졌던 테크니스코프 필름에 대한 것이었다.
첫째, 네거티브 필름은 말 그대로 가장 많은 색상 정보를 담고 있는 원본으로서 그대로 보존하여 후세대에 전해줘야 하나, 대체로 필름의 물리적 상태가 노후하여 추가 훼손이 발생하기 쉬운 상태였고 화학적인 분해반응과 그에 따른 수축이 진행 중이었다. 또한 컷을 이어붙인 부분들의 접착력이 헐거워졌을 뿐더러 각종 효과나 자막을 위해 덧대어진 겹필름(통칭 O.L. 필름, OverLapped film)들은 장기 보존 측면에서 좋지 않았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네거티브 필름을 새 마스터프린트 필름으로 복사해 놓을필요가 있었다.
두 번째 프로젝트는 보존용 네거티브 필름이 유실된 채 상영용 프린트 필름만 남아 있는 작품들에 대한 보존 대책이었다. 프린트 필름은 원본 네거티브 필름으로부터 1~3세대를 거쳐 만들어진 상영본이므로 네거티브의 풍부한 색정보와 선예도를 모두 간직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나 네거티브 필름이 사라진 작품이라면, 프린트가 원본의 지위를 대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런 경우
프린트 필름을 보존용 네거티브 필름으로 복사하고 여기서 다시 새 프린트 필름을 만들어 놓는다면 원본 프린트가 소모되는 불안한 상황을 피할 수 있게 된다.
2기: 필름, 디지털을 만나다
마지막으로 언급한 테크니스코프 필름 복원 프로젝트는 사실 계획 단계에서조차 성공여부를 확신할 수 없었다. 제작비 절감 등의 이유로 한 프레임 영역에 두 프레임을 촬영하는 시도는 세계 영화사에서 많이 등장하지만, 그 중에서도 테크니스코프는 국내에서 만든 전용 카메라와 현상기에서만 제작이 가능한 일종의 현지화 기술이었다. 이후 사실상 관련 장비가 사라지면서 테크니스코프 필름을 현상하고 영사할 수 있는 길도 막혀 버렸기 때문에 148편의 70년대 작품이 공개되지 못하고 보존고에서 잠자고 있었다. 때문에 아카이브 입장에서 테크니스코프 필름에 대한 부채감은 상당했다. 수소문 끝에 페업한 현상소에 보관 중이던 전용 장비를 발견하여 2002년 경 10분 가량의 테스트 인화에 성공했으나 실망스러운 품질과 비용문제 등으로 인해 현실화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돌파구를 열어주며 화려하게 등장한 것이 디지털 기술이었다. 2005년, 텔레시네(필름을 비디오로 변환한 것) 영상을 디지털 캡쳐하여 프레임을 반으로 자르고 순서를 재정렬하는 방식으로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다. 계속된 연구 끝에 결국 2008년에 <부(父)-기러기 가족>(윤정수, 1973)으로 테크니스코프 상영본 제작에 처음 성공하게 되었다.
알루미늄 캔 속에서 잠자고 있던 테크니스코프 영화를 스크린으로 불러내기까지 10년. 그것은 우리 자료원 기술센터 사람들의 숨은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변형 사이즈의 특수한 포맷으로 1960년대 말부터 10여 년간 존속하다 사라진 테크니스코프 영화들은 오랫동안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자, 버려진 유산이었다. 자료원에 입사한 지 3년 만에 영화필름의 보존업무를 맡으면서 필름수장고에 들어갔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띈 필름! 필름 캔에 <기러기 가족(?)>이라는 라벨이 붙어 있었을 뿐, 필름에 대한 다른 정보는 없었다. 왜 ‘?’표가 붙어 있는지 궁금했고 그 이유를 선배들에게 물었다. 내가 들은 답은 “필름이 일반 필름과 달리 하프사이즈이기 때문에 내용을 알 수 없고, 장비가 없어서 점검도 불가능 하다는 것”이었다
이후 외국의 아카이브나 현상소 관계자를 만나면 수시로 이 필름에 대해 질문했다. 1998년 FIAF(국제영상자료원연맹) Summer School에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현상소에서 온 요한 프리지스라는 기술자를 만났는데 그로부터 이 필름 포맷이 1963년 이탈리아에서 개발되었으며 옥스베리라는 인화기에서 복제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지금이야 인터넷에서 이 필름과 관련된 정보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으니 금석지감!). 그 뒤 국내에서 옥스베리 기기를 갖고 있는 현상소와 테크니스코프 복원을 논의해보았지만 부속장비 등의 문제로 결국 작업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중략) ... 테크니스코프 필름을 디지털로 전환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이 방법의 가장 큰 장점은 복원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05년 당시 SD텔레시네 가격이 100만원 정도여서 자료원이 편집 장비 정도만 갖춘다면 편당 200만원 내외에서 복원이 가능하였다. 이런 조사들을 통해 2005년 말에는 ‘영화필름 복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고, 2007년부터 복원복제 예산이 증액되어 이제는 지속적으로 테크니스코프 필름을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 고전영화 세계의 한복판에 디지털이 깊숙이 자리잡게 된 또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시기는 2007년이었다. 우리는 국내 최초로 <열녀문>(신상옥, 1962)의 2K 디지털 복원에 성공했고, 그 해 칸 국제영화제에 출품했다. 이는 기존의 필름 작업환경에서는 할 수 없었던 프레임 단위의 화질 보정이 고전영화 필름 화면을 어떻게 변모시키는지 모두에게 확연히 각인시켜 준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이끄는 세계 비영리 복원지원 단체, 세계영화재단(WCF, World Cinema Foundation)의 요청과 지원으로 <하녀>(김기영, 1960)를 복원하여 칸 국제영화제에 공개하면서부터 세계 순회 상영 랠리를 시작했다. <하녀>는 2010년 임상수 감독의 리메이크작과 동시개봉을 하기도 했고, 2012년 프랑스 지역 재개봉, 블루레이 세계 배급 등 자료원이 이전의 프린트 필름 시대에 경험하지 못했던 성취를 이어 갔다. 이후에도 매년 새로운 한국 고전영화 복원작이 영화제, DVD, 블루레이 등을 통해 대중에 공개되었고 급기야는 복원이 고전영화를 영화제에서 보여주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자리 잡게 됐다.
자료원이 디지털 복원에 대한 막연한 생각을 갖기 시작한 건 1995년이다. 당시 학계 영상전문가들로 구성된 20여 명과 영상 복원에 신기술 적용 가능성을 논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이때 발표된 그래픽 장비에 복원 기능이 일부 포함되어 있었기에, 이를 이용해 디지털 복원이 가능한지의 여부가 논의되었다. 우선 <검사와 여선생>(1948) 일부를 테스트해보기로 했다. 하지만 당시로선 전체적인 복원 품질 개선도 어렵고 예산, 인력의 문제 등으로 현실성이 떨어져 좀 더 기술이 발전되길 기다려보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디지털 복원은 그렇게 우리와는 먼 얘기였다. (중략) ... 당시 자료원 직원이 고전영화 <자유만세>(1946)를 대상으로 한 달간 작업한 결과 5분가량의 기초적인 복원을 할 수 있었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워낙 고난도의 작업이었고, 전문인력과 예산이 없었기 때문에 아쉽게도 디지털 복원에 대한 꿈을 또 한 번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4년 후 자료원은 해외에 산재한 우리의 고전영화를 수집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었다. 그 결과 대만영상자료원에서 <열녀문>(신상옥, 1962)을 발굴하는 성과를 얻었고, 이 영화는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일반에 공개하기로 결정됐다. 하지만 관계자들이 모여 첫 시사를 한 결과, 훼손 상태가 심각하여 대사 전달도 어렵고 영상 품질도 형편없어 관객에게 보여주기 어려울 것이라는 부정적인 의견이 나왔다. 당시 국내에서 이 영화의 디지털 복원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뿐이었는데, 이마저도 전체를 복원해 본 경험은 없었다. 밑져야 본전, 아니 밑지면 ‘예산 낭비’라는 절실한 마음으로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나아진 영상과 음향으로 <열녀문>을 일반에 공개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우선 부분 복원작업을 해본 경험이 있는 후반작업 업체와 부산국제영화제, 그리고 자료원이 공동으로 복원작업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시간이 촉박해서 목표치를 낮추는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19일간의 작업으로 약 40% 복원된 결과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공개했다. (중략) ... 이후 칸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의 눈에 띄어 2007년 본격적으로 <열녀문>의 나머지 복원작업을 마친 후 그해 칸국제영화제 클래식 섹션 복원 부문에 출품하게 되었고, 자신감을 얻은 자료원의 기술팀은 2008년 <하녀>(김기영, 1960), 2009년 <연산군>(신상옥, 1961)을 연이어 칸영화제에 출품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디지털시네마가 대중과 한국 고전영화 사이의 견고한 벽을 허무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이제 노후 필름들이 현 세대의 손을 많이 타지 않고 미래 세대로 전달될 수 있게 되었다는 데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다. 디지털시네마의 색과 질감이 원본으로서의 필름의 지위를 대체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지만 필름이 지닌 세월의 흔적을 걷어내고 개봉 당시의 원형에 가까운 화면을 재현한 좋은 모사품의 역할은 충분히 감당해 냈다고 생각한다. 복원을 고민하는 입장에서 디지털시네마는 필름의 영구보존을 위한 좋은 대체 활용본이었고, 디지털 기술은 전통적인 필름 복원 프로세스로 해결할 수 없을 때 좋은 대안이었다. 특히 테크니스코프 디지털화의 성공에 고무된 우리는 그동안 작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필름들에 적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독자적인 시스템으로 제작됐던 한국 고전 입체영화 필름들을 스캔하여 상영본을 만들고 오늘날의 영사방식으로 재현하는 시도 같은 것들이었다. 또 하나는 훼손이 심하여 많이 수축된 필름들의 디지털화였다. 아카이브 특성에 맞게 나온 필름 스캐너는 통념상의 수축한계를 넘은 필름들도 곧잘 스캔할 수 있었다. 앞서 언급한 프린트만 남아 있는 작품들을 복원하는 프로젝트도 비용이 높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인화,현상을 하는 것보다 디지털화하는 것이 더 나은 경우가 많았다. 이런 이유로 2011년 두 번째 필름복원 중기계획을 수립할 때는 디지털 작업의 지원 비중을 본격적으로 높였다.
3기: 디지털의 광풍, 필름의 실종
필름이 앞서가고 디지털이 받쳐주는 이 아름다운 공생의 시기는 예상보다 일찍 산산조각이 났다. 2000년대 후반, 대형 제작사와 방송사들이 필름/비디오테이프 대신 디지털시네마/파일기반 시스템을 선택하면서 시작된 변화의 해일은 영상산업계를 빠르게 평정하고 이내 아카이브를 덮쳤다. 2012년 1월 코닥(Kodak)사가 파산 보호 신청을 했을 즈음에는 이미 필름 산업이 급속하게 쇠락한 상황이었다. 필름 상영관은 디지털시네마 극장 체인으로 재편됐다. 그리고 드디어 2013년을 기점으로 국내의 모든 현상소가 문을 닫았다. 따라서 이들 현상소에 의존하던 필름 복원 중기사업은 자료원이 2016년 필름현상소를 자체 구축하기 전까지 수년간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필름의 앞날이 디지털화에 좌우되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필름을 대여받기 위해 대만 측이 요구한 모든 절차를 거친 후에 2014년 3월 드디어 <저 하늘에도 슬픔이>의 듀프 네거티브(DN) 필름이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자료원에서 검수한 결과 우려했던 것보다는 필름의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이 필름이 이제 전 세계에 한 벌뿐이기 때문에 자료원이 마스터 프린트라는 필름 형태로 다시 복제해야 했는데, 국내 영화 제작 환경이 급속히 디지털화하면서 국내 현상소가 모두 문을 닫은 것이다. 이대로라면 일본의 이마지카 현상소에 필름을 보내 복사작업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매우 다행스럽게도 과거 서울현상소라는 이름으로 필름 작업을 하던 (주)서울무비웍스가 공식적으로는 문을 닫았지만 현상 시설을 완전히 해체하기 전에 비공식적으로 작업을 해줄 수 있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그렇게 하여 <저 하늘에도 슬픔이>는 국내에서는 마지막으로 마스터 필름으로 제작된 영화가 되었다.
한편 2011년, 우리는 필름 디지털화 및 복원에 관한 5개년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2007년부터 시작한 디지털 복원 작업은 많은 비용과 오랜 기간이 소요되어 거의 한 세기를 아우르는 한국 고전영화 필름들의 보존과 복원에 큰 부분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디지털 영상은 최첨단 기술이며 절대 선이라는 시각이, 필름은 낡고 구식인 매체라는 고정관념이 지배적이었으므로 세상은 우리에게 하루라도 빨리 모든 보유 필름을 새로운 디지털 자료로 변환해야 한다는 압박을 가해오기 시작했다. 따라서 우리는 프레임 단위의 화면 보정 작업을 생략하고 디지털 색재현 작업에 집중하여 비교적 단기간에 많은 작품을 공개할 수 있는 필름 디지털화 사업을 또 하나의 프로젝트로 포함시켰다. 여기에는 미래 세대를 고려한 다른 의도도 있었다. 2000년대 초중반 SD화질의 디지베타 시대가 막을 내리고 HD화질의 HDCAM이 주류가 되나 싶더니 몇 년 만에 2K 화질의 디지털시네마가 일반화되었다. 어떤 한국영화 네거티브 필름은 근 10년 동안 SD 텔레시네, HD 텔레시네, 활용용 프린트 복사, 2K 디지털 스캔 등 수차례의 작업에 반복하여 사용되었다. 한 필름이 수시로 보존고에서 나와 상온에 노출되고 여러 장비와 접촉하는 상황은 분명 바람직하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로선 최고화질인 2K 디지털시네마를 만들고 동시에 하위 해상도의 활용본을 함께 제작하여 필름 사용 빈도를 줄이고자 했다. 더욱이 디지털 2K 해상도는 일반적으로 상영용 프린트 필름과 유사한 수준이라고 판단되는 것인 만큼, 네거티브 필름의 대체재는 될 수 없더라도 최소한 프린트에 근접한 관람의 수준을 후세에 전달할 수 있는 보조 작업의 의미는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물론 2K 디지털화 작업들을 진행하면서 놀랄만한 성과들도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원본 보존에 대한 개념이 흔들리고 아키비스트의 직업 윤리가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필름이라는 매체의 규격 안에 견고히 자리 잡아 있던 필름 정보들은 0과 1로 양자화된 순간부터 얼마든지 자유롭게 변형하거나 가공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무서운 자유도 때문에 필름의 진본성은 근본부터 위협받게 되었다. 지금 숨 쉬고 있는 우리의 눈으로 ‘옳다, 아름답다’라고 생각하는 화면으로 만드는 것이 선이라는 의견이 다수인 상황은 현 세대의 욕망에 함몰되어 과거와 미래세대가 원본을 볼 권리가 위태로워지는 것과 다름없다. 실제로 디지털로 인해 고전영화가 대중화되는 동시에 상업적 가치가 재창출되면서 복원 작업에 대한 평가가 새로운 극장 개봉작 또는 드라마 프로그램의 색감, 화질을 기준으로 내려지는 경향이 심화되었다. 매끈한 디지털 촬영본에 비해 필름 입자가 형성하는 자글거림(속칭 grain, 정확히는 granularity)은 보정의 대상으로 인식되었고, 높은 콘트라스트와 과한 채도가 유행할 때는 이것이 필름의 은근한 명/암부 디테일보다 더 전문적이라고 판단되기도 했다. 심지어는 필름 보존 공간이 부족한 문제와 연결지어 ‘더 좋은 품질의’ 디지털 상영본이 만들어진 후에도 원본 필름을 보존할 가치가 있는가 하는 얘기도 심심찮게 나오기까지 했다.
4기: 파주보존센터 시대 개막
2016년, 우리 아카이브의 보존과 복원 기능을 분리 독립한 보존센터를 파주에서 운영하기 시작했다. 파주보존센터 건립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다. 3년가량 명맥이 끊겼던 필름 현상소를 다시 돌리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4K 디지털화가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필름 현상소를 자체적으로 운영한다는 것은 우리가 필름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필름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의 천명과 다름없다. 이제 필름 복원 프로젝트를 재개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4K 디지털화를 시작했다는 것은 단순히 UHD 시대의 기술변화에 부응한다는 취지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제 네거티브 필름의 평균적인 화질에 상응하는 수준의 디지털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데에 방점을 찍어야 할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현상소가 급감하는 이유는 단지 디지털 시대에 필름의 수요가 줄어들어서만은 아니다. 한 해외 아카이브 관계자는 현상 시설을 운영하지 않는 이유를 묻자 솔직하게 ‘어려워서’라고 말했다. 그래서 ‘잘하는 곳’에 작업을 맡기고 있다고 했다. 재정적, 기술적인 면을 모두 담은 말일 것이다. 국내에서 명맥이 끊긴 지 3년 만에 현상소가 부활한 것은 자료원만의 의지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여전히 필름을 최고의 표현 매체로 생각하는 많은 사람, 주옥같은 우리의 고전영화가 한시라도 빨리 새 필름으로 옮겨져야 한다는 많은 이들의 바람이 이루어낸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부담스럽지만, 앞날은 밝다.
파주보존센터의 시작을 기념하며 2014년부터 2년간 복원한 <오발탄>(유현목, 1961)을 공개했다. 10여 년 간의 2K 디지털복원 경험의 결정체이자 아마도 세계 최초로 원본 프린트에 있던 외국어자막을 모두 지워낸 작품일 것이다. 그리고 그 해의 끝은 처음으로 4K 해상도로 복원한 고전영화 필름, <피아골>(이강천, 1955)로 마감했다. 4K 해상도로 스캔한 원본 이미지들은 대체로 네거티브 필름에 비유하여 디지털 네거티브라고 부를 만하고, 언젠가 필름 현상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날이 오더라도 어느 정도는 고전영화 유산의 존속을 지탱할 2차 보존재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첫 4K 복원작인데, 해법도 없고 시간도 무한대로 걸릴 수 있는 상황이라니. 그뿐이 아니다. 흔히 오래된 유화 표면이 거미줄처럼 갈라지듯이 화면 전체에 미세한 균열이 생긴 구간이 있었다. 이는 우리가 디지털 복원 20여 편, 디지털화 120여 편을 하면서 처음 보는 현상이었다. 아마도 2K 해상도였다면? 크게 도드라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어쨌든 <피아골>은 할 수 있는 온갖 방법과 연구를 통해 기어이 복원되었다. 그것도 매우 성공적인 품질로 말이다. 하지만 은근히 배어 있는 얼룩 따위는 스크래치나 먼지처럼 드라마틱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원본과 복원본을 동시에 비교하더라도 이 작업이 얼마나 치열했고 그 성과가 얼마나 대단한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 ‘쉬워 보인다’. 설명을 돕기 위해 예를 들겠다. 2010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메트로폴리스 Metropolis>(프리츠 랑, 1927) 복원 프로젝트의 가장 큰 걸림돌이던 기술적 난제와 <피아골>의 상황이 유사했다고 보면 된다. <메트로폴리스>는 새로운 솔루션을 도입해서, <피아골>은 기존 솔루션의 연구를 통해 어떻게든 나름의 기준에 맞게 복원을 완료했다.
4K 디지털화 체제는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 주었다. 그것은 우리가 다루는 대상이 필름이라는 것, 필름 특유의 자글거리는 입자(grain)가 필름의 상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4K 스캐닝은 2K와 달리 필름 입자감의 왜곡(grain aliasing)이 거의 없이 필름의 정보를 가져온다. 부드럽게 왜곡되었던 2K의 입자감에 비해 4K는 선명하고 때로는 날카로운 입자감이 그대로 나타난다. 이것이 디지털 복원 작업에 1차적인 영향을 주었다. 디지털 복원의 마법이란 간단히 말해서 각 픽셀의 시간/공간에 따른 연관관계를 분석하고 비정상적인 부분을 적정한 픽셀로 대체하는 알고리듬에 의해 가능한 것인데, 그레인이 주는 수치적 혼동은 오작동률의 상승으로, 오작동률의 상승은 2차 수동 보정 작업 물량의 증가로 고스란히 전이된다. 복원이 더 까다로워지고 오래 걸리고 비용도 상승하게 되는 것이다.
파주보존센터를 기점으로 한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는 필름 음향 스캔과 복원에 대한 집중 연구가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는 필름 시대에는 물론이고 디지털 광풍이 몰아친 최근의 10여 년 동안에도 고전영화 필름의 음향은 늘 화면의 조력자로서 그저 존재했을 뿐이었다. 대중은 화면에 비해 너그러운 기준으로 받아들였고, 화면만으로도 벅찬 아키비스트에게는 늘 향후 과제였다. 그러나 화면 뿐 아니라 음향도 마찬가지로 엄연히 개봉 당시의 상태로 회귀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음향도 화면의 경우와 같이 디지털의 자유도가 주는 위험 속에서 원본의 범위와 기준에 대해 새로이 고민하게 되었다. 작지만 더 복잡한 또 다른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복원된 음질의 효과는 예상보다 강력했다.
「아카이브 프리즘」을 열며
이제까지의 내용은 「영화천국」과 함께 한 10년 동안의 대략적인 복원 연대기이다. ‘필름’과 ‘복원’이라는 단순한 단어 속에 감춰진 혼돈의 세계는 아마도 이생에 정리될 것 같지 않다. 어차피 아키비스트는 영생을 사는 존재이고 우리는 그 중 몇십 년 정도의 지분을 갖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살았고, 살고 있으며, 태어날 모두에 대한 책임을 지고 끊임없이 필름을 연구해야 하는 우리는 2019년이 저무는 이 순간에도 정리되지 못한, 그러나 반드시 해결해야 할 여러 이슈들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있다. 이 중 일부는 앞으로 「아카이브 프리즘」을 통해 나눌 대화의 주제가 되기를 바라지만, 어쩌면 10년 후에도 여전히 고민만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앞으로 우리의 시선이 향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가장 급한 것은 소량만 보유하고 있어 그동안 유보되어 왔던 8mm, 65/70mm 필름에 대한 대응력을 갖추는 것이다. 이 규격의 필름들을 취급할 수 있는 필름보수 및 확인 장비, 필름 스캐너를 확충하여 한시바삐 이 필름들을 디지털화해야 한다. 8mm 필름들은 국내에서 작업할 수 없어 해외에 의뢰하고 있으며 단 1편 보유하고 있는 65/70mm 작품은 많이 훼손되어서 빨리 작업해야 한다. 역시 소량만 보유하고 있어 그간 미뤄온 무성영화에 대한 기술 연구도 깊이 있게 접근해야 한다. 테크니컬러/이스트만컬러 이전 초기영화 시대의 색감에 대한 판단과 디지털 방식의 재현(Digital Desmet)은 물론이고, 핸드 크랭킹 카메라의 촬영속도에 대한 고증과 기술적·철학적 대응 기준, 자연스러운 속도로의 보정에 대한 문제, 간자막(intertitle)의 시대별 고증 등 연구 주제가 너무도 많다.
가장 중요한 주제는 시대별 필름의 색감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것이다. 이제 필름의 경험은 우리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고 아카이브도 세대교체에 따른 아키비스트들의 경험치 차이가 심화되고 있다. 색보정이 색재현과 다르다는 사실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는 것조차 쉽지 않고, 물량에서 압도하는 현 세대 디지털 영상의 색상 기준은 이미 상당 부분 고전영화 작업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이는 회복하기 어려운 매우 심각한 문제인 동시에 반론의 여지도 있어 불가항력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어찌됐든 현행 디지털 색보정의 기준을 무조건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필름 상황에 맞는 유연한 접근 방식을 연구하고 적용해야 할 필요는 분명히 있다.
많이 훼손되어 디지털 스캔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는 필름을 화학적으로 전처리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 필름이 경화되어 롤 상태로 굳어버리거나 바스러지기 쉬운 상태로 변한 경우, 이 필름은 볼 수가 없으므로 사실상 보존의 의미가 없어진다. 그래서 필름 연구 기능을 갖춘 극소수의 아카이브들은 적정 기간에 적정 화학물질에 노출시켜 필름의 상태를 스캔할 수 있는 정도로 변화시킨다. 이후에도 필름의 호전된 상태가 장기 보존될지, 일정 시간 후에 전보다 더 악화될지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아카이브는 없다. 하지만 영원히 사라질 뻔한 필름을 디지털 영상으로 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4K 시대에 접어들어 다시 부각된 그레인의 문제도 더 심도 있는 연구와 고민이 필요하다. 필름 시대에는 원본 네거티브로부터 프린트 필름이 만들어지기까지 필름 세대를 거칠 때마다 그레인이 적정하게 완화되었다. 지금 우리는 원본 네거티브의 그레인을 대부분 그대로 디지털로 변환하지만, 이후 전통적인 필름 공정에 의한 그레인의 자연 완화를 에뮬레이션할 기준과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 사실 같은 작품의 프린트 필름이라도 어떤 과정을 거쳐 나온 필름인가에 따라 그레인이 다를 수 있으므로 어느 정도의 주관성을 염두에 두고 접근해야 하는 모호함도 있다. 사용된 필름 스톡에 따라 한 작품 내에서 그레인이 다를 경우에 이를 균일화하는 게 맞는지에 대한 철학적 판단도 필요하다.
몇 가지만 언급했지만, 아카이브로서 마땅히 파고들어야 할 이런 주제들이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은 시간과 인력이 부족한 탓이 크다. 한국에서 유독 강력했던 디지털 광풍의 시대를 거치며 우리의 연간 작업 편수는 10년 새에 2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연 40편이 넘는 디지털화 물량은 이론의 여지가 있다고는 하나 아카이브로서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나라에 필름과 아카이브의 기술적 주제에 대한 제대로 된 교육과정이 없고, 연구자가 부족한 것에 있다. 아카이브가 단독으로 모든 것을 연구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대학과 아카이브, 연구자와 아카이브의 다양한 협력관계가 주는 강력한 효과는 저변이 풍부한 해외 아카이브들의 예를 봐도 알 수 있다. 어느 것 하나 단기에 해결될 수는 없어 보인다. 다만 분명한 것은 아카이브는 혼자 성장할 수 없으며, 아키비스트의 윤리와 철학도 많은 이들의 지지와 감시가 따라야 조직문화로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아카이브 프리즘」이 아카이브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 통로가 되어 긴 변화의 작은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