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의 장소로서의 ‘극장’,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 시리즈
<장군의 아들>은 실존 인물 김두한을 소재로 한 영화다. 영화는 종로를 배경으로 해 종로와 명동 깡패들의 주먹세계를 식민지 조선과 제국 일본의 헤게모니 투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식민지 시기 종로라는 공간은 청계천 이남인 명동(당시 혼마치)과 경쟁하는 조선인들의 인종 공간이었다.
사반세기가 지나 다시 본 <장군의 아들>은 새롭고 놀라웠다. 임권택 감독은 이 시기 종로 풍경을 세트에 사실감 있게 재현해냈다. 식민지 문화사 연구가 본격화하기 이전인 1990년 작품임을 감안하면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종로에 대한 생존자들의 기억과 잔존한 사료들을 얼마나 정교하게 활용했는지 짐작할만 하다. 육체파 호남형 배우들이 담당했던 액션배우의 전통을 깨고 영화는 파격적으로 갓 20세를 넘은 앳된 얼굴의 박상민을 기용했다. 제작자 이태원의 회고에 의하면 감독과 그가 원했던 것은 우락부락한 무인 타입이 아니라 ‘우수에 찬 곱상한 얼굴’이었다고 한다. 영화사가들은 이 영화가 1990년대 초반 실감 나는 액션과 일본인 야쿠자와의 경쟁에서 야기되는 민족주의적 통쾌함을 바탕으로 선풍적인 흥행몰이를 했음에 주목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우리는 이 영화를 변화하는 동아시아영화의 맥락 속에 서 재발견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이와 관련된 최근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관련된 재평가 작업을 하고 있기도 하다.) <장군의아들>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기원의 장소로서의 종로, 압축하자면 식민지 극장이다.
<장군의 아들> 시리즈의 상징적 공간, 종로의 극장통
영화가 좋아 극장의 마치마와리(町廻, 악극단과 배우를 내세운 거리 선전) 담당으로 허드렛일을 시작한 김두한이 멘 광고판 속에는 <장화홍련전>(홍개명, 1936)과 <홍길동전>(이명우, 1935)이 등장한다. 1936년 즈음이라는 말이다. 그는 영화를 실컷 보기 위해 우미관에 일자리를 얻었고, 영화표를 빼앗은 청년과 싸움을 벌이다 중간 보스의 눈에 띄어 깡패의 세계에 들어선다. 여성과의 첫 경험도 극장의 분장실에서 이루어진다. 그가 종로의 1인자로 추대받아 연설을 하는 공간도 극장이다. 이렇듯 김두한의 성장에서 영화 그리고 종로의 극장통은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한다. 실존 인물 김두한은 어릴 적 조선극장에 무료로 드나들며, 거의 서부 활극이나 (일본의) 칼싸움 무성영화를 보았으며, 10년 동안 사람 때리는 것만 봤는데 그 때문에 주먹대장이된 것 같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에게 영화는 학교였고 종로는 세계였다. <장군의 아들>은 1편에서 3편으로 이어지며, 우미관, 조선극장, 단성사를 중요한 상징적 공간으로 드러낸다.
한편 종로라는 공간은 추상적 의미에서 ‘조선’ 나아가 ‘민족’이라는 상징이 만들어지는 기원의 장소이기도 했다. 식민지 도시가 거의 그러하듯 경성은 극단적으로 분할된 도시였으며 분할의 양측에는 종로와 명동이 있었다. 종로는 일제의 침략에 맞서는 조선인의 저항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했는데, 동시에 식민지 조선의 패션과 유흥의 공간이자 갈등하는 식민성의 공간이기도 했다. 시장, 백화점, 상점, 극장 등이 밀집해 있으며, 골목에는 여관, 술집, 카페가 즐비했다. 밤이면 야시장이 열렸고, 이러한 종로의 상업성은 ‘혼마치(本町) 세력’의 물리적 침입과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다.
<장군의 아들>1편에서 김두한이 극장에서 보는 첫 번째 무성영화가 <국경>(1923, 김도산)이라는 점은 시사적이다. 변사의 설명에 등장하는 ‘하루삔’ ‘시베리아’라는 국경 너머의 공간은 스크린을 통해 종로와 접속된다. 종로는 그의 아버지의 저항의 공간인 만주와도 맞닿아 있었다. “종로는 우리나라의 심장이야. 독립군들은 만주벌판에서 싸우고 있지만 우린 이 종로 한복판에서싸우고 있단 말이야.” 종로의 옛 1인자이던 김기환은 김두한에게 이렇게 말한다. 김좌진 장군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것은 그가 일본 야쿠자 세력에 맞서 종로 상권을 지켜나가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한다. 한편 그가 1인자로 세력을 강화해가는 동안 그의 휘하에는 목포, 원산, 인천, 논산 등 전국 팔도에서 모여든 전설적 주먹꾼들이 형재애로 뭉친다. 그렇기에 종로란 단순히 분리된 공간이 아니었으며 그 자체로 팔도강산이자 온전한 ‘조선의 상징’이었으며, 나아가 만주라는 저항의 공간과 접속되는 추상적 공간이기도 했다.
식민지 극장의 관점에서 <장군의 아들>을 재평가하다
다시금 극장으로 돌아와보자. <장군의 아들> 시리즈에서 흥미로운 점은 영화의 전반적 서사가 영화관 앞에서의 일련의 결투로 스펙터클하게 무대화되며, 관객들에게 관람의 경험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영화의 서사는 연속되는 결투를 통해 고조된다. 주변적인 결투는 종로의 좁은 뒷골목에서 이루어지며, 부감 쇼트로 실감나게 연출되었다. 그리고 헤게모니권과 관련된 결정적인 결투는 대부분 극장 앞에서 벌어진다. 그리고 싸움이 벌어지면 조선인, 일본인, 학생, 경찰들이 몰려든다. 유일한 싸움의 규칙은 맨주먹으로 싸운다는 것, 그리고 진자는 승복하고 종로를 떠난다는 것이다. 관객은 영화 속 싸움의 관람자 위치에 영화내적 싸움의 심리적 응원자가 된다.
21세기에 들어서 <장군의 아들>은 동아시아의 과거 회고 영화와의 배치 속에서 특정화된 동아시아 액션영화로 재평가될 만하다. 대표적인 아이콘은 실존 인물인 엽문(1893~1972)과 김두한(1918~1972)이다. 중국 근대국가 형성기의 실존 인물인 ‘엽문’을 소재로 한 <엽문>(엽위신, 2008)과 <일대종사>(왕가위, 2012)는 그런 점에서 <장군의 아들>과 유사한 속성들을 공유하고 있다. 이들은 또한 무대화된 결투신을 보여주는데, 민족적 갈등이 흥행의 공간에서 전시되는 장면화를 통해 영화는 국민적 의례(ritual)를 구성해낸다.
근대적 영웅에 주목하는 이러한 영화들은 문명을 앞세우는 폭력적인 제국주의의 질서에 의리와 인정의 세계를 대조시키며 신체적 강인함을 강조한다. 자국 근대의 본질을 ‘회고적’으로 구축하며 민족주의적(내지 아시아적) 근대성을 탐문하는 한국과 중국의 무협/갱스터 영화는 제국주의적 폭력성에 저항하는 가치로서 도덕적 에토스, 우애(fraternite)로 연대된 정동(情動)의 공동체, 미학적 기예(技藝)를 내세우며 동아시아의 근대성에 대한 다른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이들을 관통하는 것은 ‘무협’의 전통이 제국주의 파시즘의 질서에 반하는 기층민들의 가치로서, 전쟁의 의지와는 반대되는 곳에서 호출되고 있으며, 시기적으로는 민족주의적 국민국가 형성기라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는 일종의 균열과 주저함도 있다. <장군의 아들>이 보여주는 지점은 식민지 후반기, 일본이 패전하기 직전 군국주의가 가장 강화되었을 때까지다. 영화의 바깥에서 실제 김두한은 식민지 말 일제의 징용을 피하기 위해 조선인 깡패들로 의용청년단을 조직해 간접적으로 일제에 부역했다. 이 청년단은 해방기 우익 청년단으로 이어졌다. 6・25전쟁 후 그는 정치깡패로 활약하다 국회위원이 되는 등 극적인 인생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지점까지만 보여준다. 관객들의 기억 속에서 재구성된 김두한은 주먹으로 야쿠자패를 제압한 조선민족의 영웅이다. 하지만 실제 <장군의 아들> 3편의 마지막 장면은 상처 받은 몸으로 종로의 뒷골목을 부축받은 채 걸어가는 김두한의 뒷모습이다. 민족주의와 선한 가치가 승리하기를 열망하는 관객의 기대 지평이 상상적으로 연출하는 결말과 감독이 실제 연출한 결말 사이에 괴리가 있어 보이는데, 이것이 탁월한 감각의 상업영화로서 <장군의 아들>이 가진 명민함이다.
by.송효정(영화평론가, 대구대학교 인문교양대학 창조융합학부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