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개봉이 아니라 공개다. 영화 <페르소나>(2018)가 처음 선보인 순간은 이렇게 기록됐다. 이경미, 임필성, 전고운, 김종관 등 개성 있는 감독 4인이 배우 이지은(아이유)과 함께 각자의 이야기를 펼쳐낸 이 옴니버스 영화는 극장이 아닌 넷플릭스를 통해 안방에서 관객을 만났다. 봉준호 감독의 <옥자>, 김성훈 감독의 드라마 <킹덤>(2019) 등 한국어를 기반으로 한 영상 콘텐츠의 저변을 넓혀온 넷플릭스는 이제 국내 창작자들과의 협업 시스템을 완벽하게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극장 개봉보다 넷플릭스 공개를 선택한 속내는 <페르소나>의 제작자 윤종신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는 3년을 준비해 단 일주일 만에 승부가 나는 극장 개봉 시스템의 불확실성 대신 세일즈 기간이 영원해 오랫동안 관객을 만날 수 있는 콘텐츠 유통 방법을 선택했고, 사용자의 취향을 분석해 콘텐츠를 추천해주는 데이터 기반 서비스에 대해 신뢰감을 표했다. 극장에서 외면받기 쉬운 소규모 영화의 리스크를 넷플릭스를 통해 해소한 것이다.
넷플릭스는 비평과 흥행을 모두 잡았다. 넷플릭스가 제작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 Roma>(2018), 코엔 형제의 <카우보이의 노래 The Ballad of Buster Scruggs>(2018) 등은 영화제를 휩쓸며 비평 면에서 괄목할 만한 성취를 이뤘다. 여기에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To All The Boys I Loved Before>(수전 존슨, 2018), <버드 박스 Bird Box>(수잔 비에르, 2018),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 Black Mirror: Bandersnatch>(데이비드 슬레이드, 2018) 등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들은 수천만 명이 시청하며 흥행에도 성공했다. 이러한 결과와 더불어 막대한 제작비를 지급하면서도 창작자의 자율성을 완벽하게 보장하는 넷플릭스의 정책은 콘텐츠 제작자들에게 거절하기 힘든 유혹이 됐다. 이뿐만이 아니다. 넷플릭스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자체 제작한 드라마 <킹덤>의 미디어 간담회는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의 강점을 여지없이 드러낸 자리였다. <킹덤>이 상영되는 도중 한국어 대사는 영어, 중국어, 프랑스어 등 12개국 언어로 전환됐다. 넷플릭스를 통하면 공개와 동시에 전 세계 190개국, 약 1억 5,000만 명(2019년 1분기 기준)의 가입자와 만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극적인 장면이었다.
유럽에서는 넷플릭스 때문에 자국 콘텐츠 생산이 줄어들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됐다. 지난해 한 컨설팅업체 보고서에 따르면 유럽 영어권 국가에서 넷플릭스의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시장 점유율이 83%에 이르고, 이탈리아?프랑스 등 비영어권 국가에서도 68%의 점유율을 기록했다고 전했다. 우리나라도 넷플릭스의 공략이 거세짐에 따라 방송 사업자와 토종 OTT업체의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는 형국이다. 막대한 자본력을 앞세워 콘텐츠를 확보하고 있는 넷플릭스에 대항하기 위해 SK텔레콤과 지상파 3사(KBS, MBC, SBS)는 최근 각사가 운영 중인 ‘옥수수’와 ‘푹(POOQ)’의 합병을 추진하기로 했다. 가입자 1,000만 명을 확보해 경쟁력을 갖출 의도다. 반면, 외주제작사와 소비자는 이런 경쟁 구도를 환영하는 입장이다. 외주제작사들은 넷플릭스가 방송사와 대형 배급사가 장악한 콘텐츠 제작 환경에 변화를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했다. 또, 소비자들은 콘텐츠의 질적 향상과 다양성을 기대 요인으로 꼽았다.
넷플릭스의 성공은 극장 배급 시스템과 대형 스튜디오에 위기로 다가왔다. 굳이 극장을 찾지 않아도 수준 높은 영화 콘텐츠를 각자의 집에서 볼 수 있다는 넷플릭스의 장점이 극장 관람객을 감소시키고, 이 여파가 대형 스튜디오의 실적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분석이 그것이다. 반면, 기존 배급 시스템이 외면한 작은 영화가 관객을 만날 기회가 늘어나고, 자본의 통제에서 좀 더 자유로운 창작 환경은 영화 산업에 미칠 긍정적인 면으로 평가된다. 세계적인 가구 제작업체 이케아가 한국에 진출할 당시 한국 가구 산업이 느낀 위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이케아는 홈 퍼니싱 열풍을 일으키며 국내 가구 시장 규모를 키우는 기폭제로 작용했다. 국내 가구 업체들이 이케아에 대응하기 위해 외형을 확대했고, 적극적으로 소비자의 라이프스타일을 분석했기 때문이다. 과거 외화 직배 허용이 오히려 한국 영화 산업의 질적 향상의 계기가 된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소비자의 콘텐츠 경험이 풍족해질수록 영화 산업도 함께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는 이유다.
by.심규한(씨네플레이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