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물
실존 인물 혹은 흘러간 시대에서 찾아낸 ‘영화보다 더 극적인 실화 영화’는 전통적인 스테디셀러다. 일단 ‘진짜’가 갖는 신뢰의 힘이 크다. 더불어 사회적 이슈라면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식의 호기심도 자극한다. 최근 한국영화도 일제강점기부터 1980~90년대의 사회적 사건을 영화로 옮기는 데 열중하는 모양새다. 한 해에 많으면 10편, 적어도 5편 이상의 근현대사 재조명 영화가 개봉한다.
근현대사 재조명 영화의 물꼬를 튼 건, 2013년 개봉한 <변호인>이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인권변호사로 거듭나기까지의 실화를 가상의 인물 ‘송우석’에 이식한 이 독특한 전기영화는 관객의 호불호가 격렬히 나뉘는 속에서도 1,100만여 명의 관객 수를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정치 성향을 숨기지 않는 근현대사 재조명 영화의 명확한 타깃 관객층이 수면으로 드러난 셈이다.
여기에 정치적인 상황도 한몫 거들었다. 세월호 참사의 이면을 담은 다큐멘터리 <다이빙벨>(이상호·안해룡, 2014)은 내용의 정확성 여부에도 불구하고, 뉴스가 말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다큐멘터리 영화로 극장에서 발화하는 ‘무비 저널리즘’ 돌풍을 일으켰다. 연달아 “어차피 대중은 개, 돼지입니다”라는 씁쓸한 명대사를 유행시키며 <내부자들>이 청불 영화의 흥행 기록을 갈아치웠다. 2016년 연말 광화문에 촛불이 들불처럼 일었고, 마치 현실을 예견이라도 한 듯 극장에선 <아수라> <더 킹>이 차례로 등장했다. 소위 ‘예언 영화’의 선전에 이어 <1987>(장준환, 2017), <택시운전사>(장훈, 2017), <공작>(2018), <국가부도의 날>(최국희, 2018)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뜨거운 사건들이 줄줄이 극장에 불려 나왔다.
<항거:유관순 이야기>
동시에 일제강점기를 다룬 영화도 부흥기를 맞았다. 이전에 야심만만한 도전이 있었지만, 줄곧 흥행에선 쓴잔을 마신 게 사실이다. 이 징크스를 깨뜨린 건 최동훈 감독의 <암살>의 공이 크다. 항일운동의 정신을 기리면서 액션 블록버스터의 쾌감을 잃지 않은 <암살>이 ‘천만 영화’에 등극하면서 일제강점기와 장르영화의 그릇에 담은 <해어화>(박흥식, 2015), <덕혜옹주>(허진호, 2016), <군함도>(류승완, 2017)가 새로운 규모의 시도를 이어갔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엔 상반기에만 <말모이>(엄유나, 2018), <항거: 유관순 이야기>(조민호, 2019), <자전차왕 엄복동>(김유성, 2018)이 개봉했고, 하반기엔 대한독립군의 최초 승리 ‘봉오동 전투’를 영화화한 <전투>(원신연)가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이처럼 길게는 100년 전의 일제강점기, 가깝게는 수년 전의 사건을 불러낸 최근 한국영화들은 ‘시대에서 찾아낸 아주 보통의 얼굴’을 매개로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시도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역사의 변곡점 꼭대기에 섰던 인물 대신 역사의 물결 위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옳은 방향’을 향해 노를 저었던 평범한 사람들이 일으킨 변화에 주목한다. 수많은 인물이 시대정신의 바통을 잇는 과정을 담은 <1987>,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목격자로서 광주의 진실을 실어 나른 <택시운전사>, 권력이 아닌 평화를 좇는 남북 공작원들의 이야기 <공작>, IMF 외환위기의 민낯을 끄집어낸 <국가부도의 날>, 우리 말과 글의 얼을 지켜낸 이름 없는 사람들의 <말모이>가 그 흐름을 꾸준히 잇고 있다. 수편의 영화 중에 시대를 불러낸 명확한 이유를 찾지 못한 채, 인물과 사건만 알사탕처럼 쏙 뽑아 먹는 ‘시대정신 없는 시대극’도 여럿 출몰했지만, 언제나처럼 외면을 받았으니 부연할 필요는 없겠다.
최근 역사 재조명 영화의 훌륭한 사례로는 이준익 감독의 <동주>(2015)와 <박열>을 꼽을 수 있다. <동주>는 시의 단편으로만 기억되던 윤동주에게서 ‘시대의 부끄러움’을 온몸으로 겪어낸 청년의 얼굴을 발견하는 동시에 송몽규라는 빛나는 이름 하나를 발굴했다. <박열> 역시 일제강점기를 정면으로 돌파한 아나키스트 박열과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여성 운동가 가네코 후미코를 찾아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시대정신을 묻는다.
그의 표현대로 “바닷가 모래알처럼 무수히 많은 시대의 인물” 중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문제를 대신 답해줄 수 있는 인물을 찾아낼 때, 그 시대를 오늘의 스크린에서 봐야 할 이유가 생긴다. 이처럼 영화를 통해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대화하고, 어제를 거울 삼아 오늘과 내일의 길을 찾는 시도는 환영할 만하다.
by.박혜은(더스크린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