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때때로 예술은 어려운 것이고 예술을 평가할 때는 겸손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예술 앞에서 겸손한 것과 작품 작성자를 존중하는 것이 다름을 모르면 자신의 의견보다 타인의 의견에 휩쓸리기 쉽다. 어렵고 복잡한 것에 하는 이의 제기는 신중하고 완벽해야만 올바른 이견이 된다고 생각한다.
20여 년 전 해외 영화제에서 상을 탄 한국 작품들을 기억하면 여자를 시종일관 학대하고 소모한 후 남자의 학대를 변명하는 핑계가 상당수였다. 여자를 학대하고 싶은 서양 남자들이 동양 남자 감독들에게 ‘여혐 커미션’을 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과 명예를 안겨주면 여성학대 영상물을 얻을 수 있고 그것으로 인해 항의가 발생하면 서양과 동양의 문화 차이라고 하면서 논란을 홍보에 쓰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상을 타 간 동양 남자 감독은 서양에서 상을 괜히 줬겠느냐고 역정을 낼 핑계가 된다.
무려 서양 영화제에 가서 국가의 이름을 드날리고 온 영화에다가 여성착취라는 기초적인 인권 문제를 제기하면 논지에 어긋나는 것인 양 취급받았다. 왜 여자를 학대하느냐고 질문하면 작품의 주제가 아니라는 이유로 논의 대상도 되지 못하거나, 감히 학대라고 하다니 왜 영화감독을 미워하느냐는 말을 들어야 했다. 몇몇 영화감독의 일관된 여성혐오를 페미니즘 관점에서 평론하면 해당 영화의 주제와 본질에 어긋난,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 무시당하기도 했다. 일개 영화감독을 ‘작가’로 만들어주기 위해서 결함을 비판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폭력이며, 그것이 어떻게 더 큰 피해로 돌아오는지는 2018년 미투 고발이 보여주었다.
해시태그 #MeToo. 이 단어가 본격적으로 확산된 것은 배우 알리사 밀라노가 자신의 일터, 즉 촬영장에서 성범죄를 당한 사람들에게 같이 이야기하자는 트윗이었다. 좋아하는 여성 배우를 팔로하던 사람들은 이들의 고발을 생생하게 들었다. 늘 즐거운 일을 올리던 배우들의 분노는 조용하기도 했고 폭발적이기도 했고 익살을 잃지 않기도 했다. 서로 아는 정도이던 배우들이 실시간으로 단합하는 것을 보는 일은 자랑스럽기도 했지만 동시에 모두가 그렇게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에 분노를 일으켰다.
예술은 인간이 만드는 인공물일 뿐이고 인간보다 중요하지 않다. 예술을 위해서 인간성을 희생하는 예술가의 모습은 허구에 불과하며, 실제 작업 현장에서 자신에게 그런 짓을 하는 자는 어리석고 타인에게 하는 자는 폭력적이다. 작업 현장에서 상위 책임자들이 예술을 위해 저질렀다는 학대를 보면 교만한 자의 변덕에 불과했고 그 결과물은 다른 팀원들의 공로를 가로챈 것이었다.
예술가연 하는 성범죄자는 재능이 있는 게 아니라 자기를 비호할 자들을 업계에 심는 데 능수능란하다. 성범죄자를 고발하고 나면 높은 확률로 따라오는 말은 그래도 실력이 좋다는 옹호 발언인데, 그자가 범죄를 저질러서 현장을 떠나야 했던 능력자가 더 많았을 것이다. 범죄자의 재능을 걱정하지 말고 범죄자 때문에 재능을 발휘하지 못한 사람을 찾아야 한다. 적임자를 찾기 싫어서 범죄자의 재능을 높이 사고 권력을 쥐여준다? 게으름이 범죄라면 바로 이런 때에 쓰라고 있는 말이다.
미투 해시태그는 피해자에게 말해도 된다는 용기를 주었다. 페미니즘은 행동의 근거를 뒷받침했으며, 성적 대상화를 통해 이득을 얻으려는 자들에게 사람들이 분노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감정을 터뜨린 여성을 미워하지 않도록 돌보았다. 영화의 미래가 있다면 영화인을 차별하거나 소진하지 않는 것이고, 가해자에게 피해를 본 사람이 일터에서 안전하게 계속 일하게 하는 것이다. 예술은 인간이 만드는 것이고 인간이 예술보다 우선한다는 당연한 확언을 하는 데 망설일 이유가 없다. 정상화가 아직 멀었지만 페미니즘은 영화계의 정상화로 가는 옳은 길이다.
by.남명희(자유기고가, 팬픽션의 이해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