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가 나한테 술 한잔하자고 했다
<카사블랑카>(1942, 마이클 커티스)
바야흐로 ‘홈술’ 시대다. 홈술은 단순히 집과 술의 조합이 아니다.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을 뒤바꾸는 키워드다. 지구상에서 나에게 가장 편한 장소인 ‘집’이라는 공간에서, 혼자 또는 가족과 함께 술을 마시며 현재의 순간을 온전히 즐기고 몸과 마음을 쉬게 하는 것. 남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그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을 가지며 완벽하게 릴렉스하는 것. 이것이 홈술의 핵심이다. 이 홈술에는 다양한 즐길 거리가 더해질 수 있다. 사람, 음식, 음악, 책, 게임기 등. 이미 오래전부터 홈술을 즐겨온 내게 그날 마시고 싶은 술을 결정해주는 건 영화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보고 싶은 영화를 고르고, 그 영화에 어울리는 술을 곁들인다. 오늘은 나의 소장 리스트에 담겨 있는, 홈술 할 때 즐겨 보는 영화들을 꺼내본다.
힘든 하루를 보냈을 때! 사람에 치이고, 되는 일이 없는 하루를 보내고 난 뒤라면 강력한 위안이 필요하다. 이럴 땐 지구의 멸망을 주제로 한 영화가 제격이다. 대표적으로 <포세이돈 Poseidon>(볼프강 페터센, 2006)과 <딥 임팩트 Deep Impact>(미미 레더, 1998)를 들 수 있다. 두 영화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죽음을 앞두고 가장 비싼 와인을 즐기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포세이돈>에서는 새해를 앞두고 대서양을 순항하던 호화 여객선 포세이돈에 거대한 쓰나미가 돌진한다. 이때 죽음을 앞둔 한 노신사는 프랑스 부르고뉴의 최고급 와인인 2005년산 ‘로마네 콩티’를 마시며 최후를 맞이한다. 지구와 소행성의 충돌을 다룬 재난영화 <딥 임팩트>에서는 충돌을 앞두고 주인공이 1997년산 ‘샤토 무통 로쉴드’를 마신다. 당장 죽음을 앞두고 있는데, 금은보화가 무슨 소용이랴.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우리네 인생. ‘그래! 인생 뭐 있어?’라고 외치며 아껴둔 좋은 술을 꺼내 들고 영화에 몰입하다 보면 아픈 기억은 점점 흐려진다.
바쁜 일상에 메마른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줄 감성이 필요할 때는 멜로영화가 제격이다. 즐겨 찾는 영화는 <카사블랑카 Casablanca>(마이클 커티즈, 1942)와 <귀여운 여인 Pretty Woman>(게리 마샬, 1990). 둘 중 어떤 영화를 볼지는 그날 구비된 샴페인에 따라 달라진다. 뵈브냐 멈이냐 또는 모엣이냐!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 <카사블랑카>에서는 모로코를 떠나려는 일자(잉그리트 버그만)가 그녀를 붙잡는 카페 주인 릭(험프리 보가트)에게 “‘뵈브 클리코’라면 남겠어요(If it’s Veuve Clicquot I’ll stay)”라고 말하고, 파리 회상 신에서는 “그대 눈동자에 건배(Here’s looking at you,kid)”라는 대사와 함께 ‘멈 코르동 루즈’가 등장한다. <귀여운 여인>에서 에드워드(리처드 기어)가 비비안(줄리아 로버츠)을 데리고 호텔로 들어가 주문한 샴페인은 모엣샹동. 에드워드는 “샴페인의 향을 돋워준다”며 딸기를 함께 먹어보라고 권한다. 해당 장면에 나오는 와인을 준비해서 맛보고 있다 보면 마치 내가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먹방이 필요한 날은 ‘셰프’를 찾게 된다. 요리를 소재로 한 영화가 많지만, 가장 좋아하는 셰프는 <라따뚜이 Ratatouille>(브래드 버드, 잔 핑카바, 2007)에 등장한다. 절대미각의 소유자 ‘생쥐 레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다. 요리 천재인 생쥐가 요리에 서툰 남자 주인공 ‘링귀니’를 지휘한다는 독특한 설정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다양한 요리와 따뜻한 이야기를 담아낸 애니메이션이다. 영화에서는 파리의 일류 레스토랑인 구스토 레스토랑의 고급 요리와 함께 주옥같은 와인들이 등장한다. 레스토랑을 노리는 총주방장이 링귀니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내놓는 1961년산 ‘샤토 라투르(Ch teau Latour)’, 까다로운 음식비평가 안톤 이고가 구스토 레스토랑에서 주문하는 1947년산 ‘샤토 슈발 블랑(Chateau Cheval Blanc)’ 등등. 집에서 직접 요리한 음식에 와인을 곁들여 마시며 까탈스러운 안톤 이고가 레미의 요리에 마음을 열어가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외에도 홈술 하며 즐길 영화가 많다. 위스키가 생각날 땐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 The Angels’ Share>(켄 로치, 2012), 경쾌한 칵테일 한잔이 떠오를 땐 <코요테 어글리 Coyote Ugly>(데이비드 맥낼리, 2000), 하드코어 술이 생각날 땐 압생트에 <물랑 루즈 Moulin Rouge!>(바즈 루어만, 2001)…. 바야흐로 홈술 시대다. 퇴근 후 집 안 소파에 느긋하게 자리 잡은 당신. 당신에게 한잔하자고 술을 권하는 영화는 무엇인가?
by.이지민('대동여주도''언니의 술 냉장고 가이드' 콘텐츠 제작자, PR5번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