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처럼 왔다가 흔적 없이 사라진 신문물
1997년 늦여름에서 초가을로 넘어가는 서울 계동, 서울영상집단 사무실에선 수백 개가 넘는 6mm 미니 DV 테이프들을 열심히 상자에 넣고 있었다. 상자에 담긴 테이프의 행선지는 부산. 한국 독립영화의 역사와 현재를 다룬 다큐멘터리 <변방에서 중심으로>(홍형숙, 1997)가 부산국제영화제에 상영되는 것으로 예정돼 있었는데, 마침 부산 지역의 한 독립영화단체에서 ‘독립영화계 최초(!)’로 넌리니어(Non-Linear) 디지털 편집기를 장만했다기에, 거기서 영화제 시작 전까지 머무르면서 최종 편집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풀 디지털 방식 작업은 꿈도 못 꿀 수준이었으니, 편집 소스들은 모두 1:1편집을 통해 러프컷 상태로 추려놓은 것들이었다. 나는 프로듀서로서 서울에 남아 이러저런 일들을 처리해야 했는데, 감독을 비롯해 부산으로 짐 싸들고 내려간 편집팀들은 예정된 상영일이 다가오는 마지막 순간까지 날밤을 새우면서 가슴을 졸여야 했다. 지금 흔히 사용되는 컴퓨터에 비교하면 발뒤꿈치도 못 따라갈 사양으로 ‘렌더링’을 돌려대니, 그 적은 용량도 버티지 못하고 계속 다운됐던 것. 가까스로 최종 마스터를 뽑아 극장으로 달려가긴 했지만, 그 시절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던 독립영화 현장은 그랬다.
테입리스(Tapeless) 카메라에 편집 또한 100% 컴퓨터로 진행되는 요즘, 비디오테이프는 그 단어만큼이나 까마득한 옛날의 유물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비디오테이프 없이 한국에서 다큐멘터리가 가능이나 했을까(시네마테크 운동에서 비디오, 특히 VHS의 혁혁한 역할은 또 말해 무엇하리요). 그중에서도 혁명의 도화선이자 구세대의 마지막 주자로서 영화사적 변곡점의 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6mm 미니 DV다. 한국 독립다큐멘터리 발전에서 6mm 카메라를 빼놓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건 기술적 변화 이상의 것이었다.
한국 독립다큐멘터리의 본격적인 시작을 19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로 잡는다면, 이때는 완벽하게 아날로그의 시대였다. 지금은 그 이름도 생소한 Beta, U-Matic, VHS, 8mm 등 방송이나 가정용 캠코더가 촬영 장비였고, 편집도 당연히 1:1 아날로그 편집이었다. 비디오의 ‘1:1 편집’은 필름의 스테인백 편집과 같은 원리다. 즉, 스테인백에 필름을 걸어놓고 돌리다가 OK 컷을 잘라내 붙여나가듯, 플레이어에 촬영본을 넣고 보다가 OK 장면이 나오면 포즈(Pause) 상태의 레코더를 레코드(Record) 상태로 돌려 타임라인에 녹화하면서 이어 붙여 나가는 방식인 것이다. 그런데 베타캠(Betacam) 카메라와 같은 프로 장비와 아마추어용 카메라 사이에는 그 ‘때깔’의 차이만큼이나 어마어마한 ‘가격’ 차이가 있었으니, 운 좋게 방송국에 카메라맨 친구라도 있으면 모를까 대다수의 독립다큐멘터리 제작자는 침만 흘리다 말 뿐이었다(상황이 이러하니 다큐멘터리를 필름으로 찍는 것은 몇몇 사례를 제외하고는 정말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여기에 구원의 빛처럼 나타난 것이 6mm 미니 DV였다. 화질은 방송용 카메라에 버금가는 반면 가격은 10분의 1 정도밖에 안 되니, 수많은 다큐멘터리스트의 손에 들려 현장을 누빈 VX1000, TRV900 같은 장비들은 말 그대로 한 시대를 풍미한다. 나아가 개당 1만 원이 안 되는, 필름은 물론이고 베타캠(Betacam) 테이프보다 훨씬 저렴한 테이프 값으로 말미암아 다큐멘터리 작가들은 현장의 풍경과 목소리를 거의 제한 없이 기록할 수 있게 된다. 게다가 카메라는 또 어찌나 가벼운지. 조금이나마 그리고 잠시나마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기술의 발전이 민주주의를 앞당긴다”고 믿었던 때다. 아마 지금도 VX1000이라는 캠코더 이름을 들으면 가슴 떨리는 사람들이 있으리라.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얼마나 많은 빛나는 다큐멘터리가 이러한 미니 DV로 만들어졌던가!
그런데 이와 같은 DV 카메라들이 가진 또 하나의 혁명적 차이는 바로 디지털 방식의 저장 형태였다는 점이다. 아날로그 캠코더처럼 마그네틱 테이프에 리니어(Linear)한 방식으로 기록되기는 하지만, 저장 형태는 분명 디지털이었다. 말하자면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하이브리드였는데, 불과 10년 이내 완료될 디지털 시대로 전환하기 위한 출발이 (적어도 다큐멘터리에 있어서는) 여기서 시작된다. 아날로그 방식의 이미지를 컴퓨터로 받기 위해서는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캡처보드가 있어야 했지만, 미니 DV는 파이어와이어(firewire) 혹은 IEEE1394 인터페이스가 지원되는 100만 원 안팎의 플러그인 카드 하나면 됐으니, 이 역시 저가형 카메라의 보급과 함께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21세기에 접어든 지 20년도 채 안 된 지금, 앞서 언급한 거의 모든 장비와 기술, 방식이 사라져버렸다. 장대한 패러다임 변화의 과도기에 바람처럼 왔다가 흔적 없이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영화박물관의 한 켠에 VX1000 한 대가 전시되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by.강석필(영화기획,제작,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