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본 곳 중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 여행작가라면 가장 많이 들어봤을 이 질문을 나 또한 무수히 받는다. 여행지마다 성격이 다르고, 매력이 다르므로 사실 한 곳만 꼽는다는 게 어렵고, 한편으론 무의미한 일이라고 대답하면서도, 그래도 굳이 한 곳을 골라야 한다면, 언제나 ‘베를린’을 꼽는다. 베를린을 사랑하는 이유는 셀 수 없이 많다. 젊은 작가들이 모여 사는 가난한 동네에 넘치는 창의적인 에너지와 자유, ‘잘난 척’ ‘있는 척’ 하지 않는 문화와 사람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자부심, 그 자부심으로 만들어진 단단한 음악과 디자인, 그리고 내가 갈 때마다 반겨주는 베를린 친구들까지. 2007년 베를린을 처음 가보고 상사병에 걸린 나는 이듬해 겁도 없이 「다시 베를린」이란 책까지 냈고, 지금도 거의 매년 업무 겸 휴가 겸 베를린에 간다. 이런 도시를 더욱 사랑하게 만들어준 영화가 바로 <
베를린 콜링 Berlin Calling>(하네스 스퇴르, 2008)이다. 아니 어쩌면 베를린이 이 영화를 더 사랑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2009년 제천국제영화제에 한 번 초대되었을 뿐 국내에 정식 개봉한 적이 없(는 걸로 안)다. 비슷한 시기에 나는 베를린 크루들이 서울에 만든 플래툰 쿤스트할레에서 운 좋게 이 영화를 보게 됐다.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전 세계 클럽을 돌며 공연하는 베를린 출신의 유명 DJ(이카루스)가 마약에 빠져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스스로 극복해가는 과정을 담았다. 영화에는 베를린 클럽과 문화, 마약·섹스의 장면들이 충격적인 영상과 그보다 더 충격적인 음악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충격적인’ 음악이라 표현한 것은, 시작과 동시에 심장을 쿵쿵 울려대는 강한 테크노 음악 때문이다. 이 멋진 OST를 완성한 것은 영화의 주인공으로도 활약한 파울 칼크브레너(Paul Kalkbrenner)다. 그는 동베를린 출신의 테크노 DJ로, 실제로도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유명 DJ다.
영화의 첫 장면은 DJ 이카루스가 디제잉하는 페스티벌 현장이다. 수많은 사람이 모인 야외 무대에서 오른팔을 들고 춤을 추는 사람들. 까만 선글라스, 디제이의 파워풀한 동작, 반복적으로 울려대는 비트 등,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이 강렬하면서도 익숙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국내외 페스티벌을 많이 가본 경험 덕분이기도 하지만, 홍대 거리의 상수도와 MI, 조커레드에 묻은 나의 20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테크노 음악에 영혼을 바친 시기였으며, 홍대 클럽에서 살다시피 하던 시절이었다. ‘마약을 하면 이런 기분일까’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하면서 반복적인 음과 비트에 중독되었던 시기다.
영화에는 내가 좋아하는 베를린의 곳곳이 등장한다. 주인공 이카루스가 한낮에 음악을 들으러 간 곳은 ‘클럽 데 비지오네레’. 슈프레강의 작은 강줄기 사이에 있는 클럽으로 낮부터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맥주 한 병을 들고 강가 테라스에 퍼져 누워 있거나, 좀비처럼 끝도 없이 몸을 흔드는 베를리너들. 그 자유로움에 반했고, 나도 그들처럼 맥주를 마시고 춤을 췄더랬다.
베를린의 나이트라이프는 또 어떠한가. 주인공의 여자친구이자 매니저인 마틸다가 그를 찾기 위해 클럽 화장실마다 문을 열어젖혔을 때, 어느 칸에선 남자끼리 섹스를 하고 있고, 어느 칸에선 마약을 하고 있는 장면이 등장한다. 우리에겐 무척 충격적일 장면이다. 하지만 클럽 테이블 위에 네 명이 동시에 코를 박고 코카인을 하는 광경을 본 적이 있는 나로서는, 그 장면들이 무척 현실적이고 경험적인 것으로 다가왔다.
영화엔 이처럼 충격적이면서 현실적인 클럽 신이 많이 나오지만, 주인공이 시련을 극복해나가는 과정도 위트 있게 담겨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 모든 게 우리 일상과 뭐가 그리 다를까도 싶다. 병동 안에서 테크노를 틀어놓고 미친 듯이 춤을 추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나는 내 방에서 춤을 추던 내 모습을 본다. 영화는 예술과 자유, 광기와 무아지경, 가족, 우정, 사랑 등에 대해 아무런 편견 없이 이야기한다. 영화는 당신이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평범하든 혹은 미쳤든 구분하지 않고 보여준다. 어쩌면 무심하게 느껴질 정도로 이야기하는 온갖 것이야말로 베를린스럽다.
게다가 영화에는 내가 사랑하는 테크노 음악이 가득하다. 그 비트를 타고 펼쳐지는 베를린의 풍경은 어느새 나를 그곳으로 데려다놓는다. 이카루스가 헤드셋을 끼고 내려다보던 베를린 시내의 저녁 노을, 그가 걸어가던 오버바움 브리지, 베를린장벽이 있던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이카루스가 트램 문이 열리고 닫힐 때의 안내방송과 사운드를 녹음하던 베를린의 S반까지, 익숙하고 그리운 장면 속을 어느새 나도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