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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 만든 콘텐츠, 효자 영화로 거듭나다

    하나의 콘텐츠로 여러 문화권을 공략하는 ‘원 소스 멀티 테리토리(one source multi territory)’ 전략은 요즘 한국영화계의 중요한 화두다. 국내 865만 관객을 모은 황동혁 감독의 판타지 코미디 <
    수상한 그녀>(2013)는 중국, 베트남, 일본, 태국, 인도네시아판으로 제작되어 좋은 성적을 거뒀고, 이후 제2의 <수상한 그녀>를 노리는 작품이 다채롭게 기획, 제작되고 있다. 판권만 판매하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우리 영화인이 주도적으로 해외 리메이크를 추진하는, 리메이크의 개념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2013)가 ‘미드’로 제작된다. 지난 1월 미국 TNT 채널은 이 영화의 드라마판을 올해 파일럿이 아닌 공식 시리즈로 제작해 방영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연출은 마블 히어로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Doctor Strange>(2016)에서 시공을 넘나드는 비주얼을 감각적으로 구현해낸 스콧 데릭슨 감독이 맡았다. 원작 연출자 봉준호 감독과 제작자 박찬욱 감독이 프로듀서로 참여하고, 국내 투자?배급을 진행한 CJ엔터테인먼트(이하 CJ)가 투모로우 스튜디오, 터너스 스튜디오 T와 드라마판 공동 제작에 나섰다. 해외 영화사에 리메이크 판권만 판매하던 시절에는 보기 힘들던 풍경이다.

    하나의 IP, 현지화된 콘텐츠

    한국영화 해외 리메이크 풍토는 최근 들어 크게 다각화하고 있다. 앞서 <설국열차>처럼 국내 투자, 배급사가 현지 파트너와 리메이크작을 공동 제작 및 지분 투자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 판권만 계약할 때보다 더 큰 지분을 인정받는 한편, 자사 IP 현지화 노하우도 쌓는다는 일석이조 전략이다. 국내시장에서 경쟁력을 검증받은 한 편의 원작 영화가 여러 언어권에서 동시에 리메이크되기도 한다. 2014년부터 매출액 2조 원대에 정체하고 있는 내수시장을 탈피해 해외에서 새로운 활로를 개척한다는 의미도 있다.

    일례로, 자고 일어나면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남자 우진의 독특한 로맨스로 주목받으며 국내에서 200만 관객을 모은 백종열 감독의 <뷰티 인사이드>(2015)는 할리우드 영화사 폭스2000이 유니버설, 소니, 뉴라인 등과 경합을 벌여 미국판 리메이크 판권을 획득했다. 하이틴 로맨스 <안녕, 헤이즐 The Fault in Our Stars>(조쉬 분, 2014)의 각본가 스콧 뉴스타드터와 마이클 H. 웨버가 각본을 맡았다.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 Game of Thrones>으로 인기를 끌며 한국에도 팬덤이 생긴 배우 에밀리아 클라크가 원작에서 한효주가 연기한 주인공 우진의 연인 역으로 주연한다.

    <뷰티 인사이드>는 현재 중국판 리메이크도 진행 중이다. 2015년 한한령에 앞서 중국 자본이 국내 영화계에 대거 투입되면서 한국영화의 중국판 리메이크 제작은 규모가 한층 커졌다. <뷰티 인사이드>의 경우, 국내 투자, 배급사 NEW가 중국 엔터테인먼트 그룹 화책미디어와 2015년 세운 합자법인 ‘화책합신’을 통해 중국판을 개발하고 있다. 스물한 명의 배우가 제각기 우진을 연기한 장면들을 매끄럽게 연출하는 등 까다로운 부분이 있는 영화인 만큼, 백종열 감독이 직접 중국판 메가폰을 잡아 원작의 노하우를 살린다. 원작 주연배우 한효주가 중국판에서 카메오 출연한다. 한효주는 원작에서 일본 배우 우에노 주리가 깜짝 출연한 장면을 소화할 예정이다.

    NEW가 화책합신을 통해 중국에서 리메이크를 진행 중인 영화는 또 있다. 김봉주 감독의 스릴러 영화 <더 폰>(2015)은 1년 전 살해당한 아내로부터 전화를 받은 남자가 아내를 구하기 위해 과거를 되돌리려는 하루 동안의 사투라는 참신한 스토리로 시나리오 단계부터 중국에서 많은 러브콜을 받았다. 화책합신은 이 영화의 중국판을 제작하며, 최근 <가문의 영광>(정흥순, 2002) 중국판 리메이크 계약 소식도 전했다.

    웹툰 작가 강풀의 인기 만화 <마녀>는 화책합신을 통해 아예 한국판과 중국판 영화를 동시 제작한다. <마녀>는 치명적인 불행을 몰고 다녀 마녀라 불리는 여자를 사랑한 남자의 이야기다. 중국에선 한국영화 <수상한 그녀>의 리메이크작 <20세여 다시 한 번 20 Once Again>으로 2015년 한중 합작 영화 최고 스코어를 거둔 첸정다오 감독이 총감독을, 한국에선 <방자전>(2010)의 김대우 감독이 연출을 맡는다. 한중 양국에 최적화된 두 편의 영화를 목표로 하나의 영화제작 판권을 구매한 국내 첫 번째 사례다. 완성된 영화를 바탕으로 한 기존 리메이크의 개념 자체가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제2의 <수상한 그녀>를 찾아라

    하나의 아이템으로 여러 문화권을 공략하는 ‘원 소스 멀티 테리토리’ 전략을 가장 적극적으로 구사하고 있는 곳은 CJ엔터테인먼트다. 국내 865만 관객을 모은 황동혁 감독의 판타지 코미디 <수상한 그녀>를 첫 모델로 중국, 베트남, 일본, 태국, 인도네시아 등에서 현지인의 역사?문화적 감성에 어필하며 대부분 좋은 성적을 거뒀다. 이어 아프리카 아메리칸 관객을 겨냥한 영어 버전과 스페인어, 터키어판도 제작 진행 중이다.

    CJ가 <수상한 그녀>의 사례를 이어받을 다음 타자로 주목한 영화는 국내 745만 관객을 모은 강형철 감독의 <써니>(2011)다. 원 소스 멀티 테리토리를 위해선 나라별로 변주가 가능한 스토리여야 한다. 임명균 CJ 해외사업본부장은 “<써니>는 학창 시절 추억과 우정, 첫사랑, 음악 등 여러 문화권에서 감동을 줄 만한 흥행 코드가 많고 나라별 상황에 맞게 변주하기 좋은 작품”이라고 전한다. 현재 베트남, 일본, 미국에서 리메이크작이 다채롭게 만들어지고 있다. <수상한 그녀>의 경험에 비춰 <써니>의 흥행 포인트였던 음악과 1980년대 정서를 각 문화권에 맞게 현지화하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일본판 <써니>는 영화 <바쿠만>(2015)으로 일본 아카데미 최우수 감독상과 음악상을 거머쥔 오오네 히토시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일본 안팎에서 연기력과 스타성을 인정받은 배우 히로세 스즈가 원작에서 심은경이 연기한 캐릭터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미국판은 뮤지컬영화 <저지 보이즈 Jersey Boys>(클린트 이스트우드, 2014)의 책임 프로듀서,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The Revenant>(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2015) 제작 총괄 등 다수의 할리우드 영화에 참여해온 브렛 래트너의 투자/제작사 렛팩 엔터테인먼트가 CJ와 시나리오를 개발 중이다. 베트남판은 <수상한 그녀>의 베트남판 크리에이티브 프로듀서이자 음악감독 응웬 꽝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베트남판 제작은 CJ와 베트남 현지 제작사 HK FILM이 설립한 합자회사 CJ HK 엔터테인먼트가 맡았다.

    CJ는 2016년 중국 상하이에서 한중 합작 라인업으로 공식 발표한 강제규 감독의 노부부 이야기 <장수상회>(2015)와 1,000만 관객을 모은 류승완 감독의 사회파 스릴러 <베테랑>(2015)의 중국판도 선보일 계획이다. 폭탄을 배달하게 된 퀵서비스맨의 오토바이 액션극 <>(조범구, 2011), 사고로 시각장애를 얻은 유도 국가대표 선수와 전과자 형의 성장 드라마 <>(권수경, 2016)의 베트남판과 귀신 보는 여자와 사랑에 빠진 남자의 호러 로맨틱 코미디 <오싹한 연애>(황인호, 2011), 오기환 감독이 자신의 데뷔작 <선물>(2001)을 직접 리메이크해 2013년 당시 중국에서 역대 로맨스 흥행 8위에 오른 <이별계약 A Wedding Invitation>(2013) 인도네시아판도 기획, 개발 중이다. CJ는 최근 새롭게 눈을 돌린 터키 시장에 국내 최초로 현지 법인을 설립하고 지난해 12월 개봉한 터키판 <이별계약>에 이어 설경구, 문소리 주연 코믹 첩보영화 <스파이>(이승준, 2012)의 터키판도 선보인다.

    도쿄, 뉴욕, 서울 등에서 실제 목격된 도시 괴담을 토대로 우리 집에 낯선 사람이 숨어 산다는 공포를 자극한 허정 감독의 <숨바꼭질>(2013)은 NEW가 국내 투자/배급했지만, CJ가 판권을 구매해 미국 리메이크에 나선 이례적인 사례다. <아바타 Avatar>(제임스 카메론, 2009) 조연으로 출연한 배우 겸 감독 조엘 데이비드 무어가 각색과 연출을 맡아 원작의 설정에 “미국의 인종, 계층 간 권력 싸움과 갈등”을 버무릴 예정이다.

    국내 영화사가 해외 리메이크에 깊숙이 관여하는 이유

    이렇듯 국내 영화사가 한국영화 해외 리메이크에 깊숙이 관여하게 된 데는 지금껏 판권 판매 방식으로 만들어진 해외 리메이크작들이 흡족할 만한 성과를 거의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하늘, 유승호 주연 스릴러 <블라인드>(안상훈, 2011)를 리메이크해 중국에서 1억 위안(약 172억 원) 이상을 벌어들인 <나는 증인이다>(2016), 안병기 감독이 자신의 호러 영화 <분신사바>(2004), <가위>(2000)를 토대로 중국에서 작품성과 흥행성을 모두 인정받은 <필선> 시리즈, 조폭 코미디 <두사부일체>(윤제균, 2001)를 드라마판으로 제작해 평균시청률 19%를 기록하며 주연 배우 나가세 도모야의 대표작으로 평가받은, 일본 NTV <마이 보스 마이 히어로 My Boss My Hero>(2006), 원빈이 주연한 액션영화 <아저씨>(이정범, 2010)의 정식 판권을 구매해 리메이크한 인도영화 <록키 핸섬 Rocky Handsome>(2016), 인기 배우 후지와라 다쓰야가 출연해 일본에서 3주 연속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하며 총 24억 엔(약 230억 원)을 벌어들인 <내가 살인범이다>(정병길, 2012)의 일본 리메이크작 <22년 후의 고백 Confession of Murder>(이리에 유, 2017) 등이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지만 대부분은 아쉬운 결과를 남겼다.

    스파이크 리 감독의 미국판 <올드보이 Oldboy>(2013)는 흥행 참패하며 역대 최악의 리메이크로 회자됐다. 이외에도 <엽기적인 그녀>(곽재용, 2001), <장화, 홍련>(김지운, 2003), <과속스캔들>(강형철, 2008), <조용한 가족>(김지운, 1999), <8월의 크리스마스>(허진호, 1998), <접속>(장윤현, 1997) 등이 미국과 중국, 일본, 독일 등에서 리메이크됐지만 미미한 수준의 흥행에 그쳤다.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2005), <공동경비구역 JSA>(2000) 등 원작의 작품성 혹은 화제성으로 판권이 팔리고도 리메이크가 불발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해외에서 한국영화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리메이크에 대한 관심은 계속 커지는 추세다. 국내 1,000만 관객 돌파에 이어 칸국제영화제의 장르 팬들을 열광시킨 <부산행>(연상호, 2016)은 프랑스 메이저 영화사 고몽이 판권을 구매해 영어로 월드와이드 리메이크에 착수했다. 또 다른 1,000만 영화 <7번방의 선물>(이환경, 2013)과 한국형 액션 누아르 <신세계>(박훈정, 2012), <악녀>(정병길, 2017), 스타 앵커가 생방송 중인 뉴스룸에 인질로 잡혔다는 긴장감 넘치는 설정으로 주목받은 <더 테러 라이브>(김병우, 2013) 등도 판권이 판매돼 중국과 인도, 터키, 미국판 등이 제작되고 있다. 김지운 감독의 2005년작 <달콤한 인생>은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쿵푸 팬더 Kuung Fu Panda> 시리즈에 참여한 한국계 감독 제니퍼 여 넬슨이 연출을, 최근 마블 히어로 영화 <블랙 팬서 Black Panther>(라이언 쿠글러, 2017)에서 주연한 마이클 B 조던이 원작에서 이병헌이 연기한 주연을 맡아 리메이크에 들어갔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기묘한 이야기 Stranger Things>로 전 세계적인 관심을 모은 숀 레비 감독의 21랩스가 제작에 나서 기대감을 더욱 높인다.  
    by.나원정(『중앙일보』 영화 담당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