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수도는 시드니나 멜버른이 아닌 인구 40만 남짓의 캔버라다. 20세기 초 수도로 선정된 후 1970년대에 이르러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계획도시 캔버라의 첫인상은 한적하지만 묵직한 내공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는 국립박물관, 국립갤러리, 전쟁박물관 등 크고 작은 문화 공간에서 잘 드러난다. 호주 국립 필름&사운드 아카이브(National Film and Sound Archive, NFSA) 역시 그중 하나다. 50여 년 동안 해부학 연구소(Institute of Anatomy)로 쓰였던 건물에 자리 잡은 NFSA는 1984년부터 30여 년간 290만 점에 달하는 호주 문화유산 보관 및 보존, 활용의 거점이었다(해부학 연구소 시절 파푸아뉴기니의 미라, 네드 켈리의 두개골 등이 전시됐던 이 건물은 2004년 자연 및 문화유산으로 커먼웰스 헤리티지 리스트에 등재됐다).
호주영화의 초상을 만나다
지난해 11월부터 NFSA는 국립초상화미술관과 손잡고 호주영화의 역사를 각종 스틸 사진과 소품?의상 등으로 재구성한 ‘스타스트럭: 호주영화의 초상(Starstruck: Australian Movie Portraits)’이라는 대규모 전시를 개최 중이다. 휴 잭맨, 니콜 키드먼, 크리스 햄스워스 등의 배우와 피터 위어나 조지 밀러 같은 감독을 할리우드에 수출한 정도로만 호주영화를 인지하던 문외한에게 엄청나게 교육적인 전시였다. 스타스트럭 전시가 올해 3월까지 국립초상화미술관에서 관람객을 만나는 한편, 같은 기간 호주 국립대학 캠퍼스 안에 위치한 NFSA 대형 극장 ARC에서 같은 이름의 영화 상영 프로그램이 열린다.
스타스트럭이 NFSA가 보유한 문화유산의 하이라이트를 마음껏 과시하는 자리라면, 세심하게 정리된 홈페이지(www.nfsa.gov.au)에서는 소장품의 다채로운 층위를 파악하고 제시하는 꼼꼼함이 돋보인다. 우선적으로 수집을 원하는 아이템 목록을 밝힌 일종의 공개수배(Most Wanted) 페이지(www.nfsa.gov.au/nfsa-most-wanted)는 얼핏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런 꼼꼼함이 가장 잘 드러나는 예시일 것이다. 원주민 관련 혹은 무성영화처럼 큰 범주도 있지만, 특정 포맷이나 시기, 혹은 주제를 밝히는 등 우선순위가 명확하고 아예 제작연도와 타이틀을 구체적으로 밝힌 경우도 적지 않다. 대부분의 대규모 아카이브가 카달로깅 자체에 급급한 것을 감안하면, 이런 리스트를 완성하기 위해 NFSA가 기울인 각고의 노력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드넓은 호주 대륙 곳곳에 흩어져 있는 이용객들이 시공을 초월해 방대하고 진귀한 자료를 접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NFSA 홈페이지의 지상 목표다. 히스 레저, 호주의 동물들, 해변 등 토픽별로 자료 영상을 스트리밍할 수 있도록 배치한 Curated Collections(www.nfsa.gov.au/collection/curated), 다양한 동영상과 오디오 파일, 고화질 3D카메라를 동원해 촬영한 소품, 의상 자료를 열람할 수 있는 온라인 전시(www.nfsa.gov.au/collection/online-exhibitions) 등은 그 일부분에 불과하다. 최근엔 <
댄싱 히어로 Strictly Ballroom>(바즈 루어만, 1992) 개봉 25주년 온라인 기념전을 열었다. 새로 촬영한 출연 배우들의 인터뷰 동영상과 스태프들의 구술 파일은 물론 각종 프로덕션 디자인 스케치 등을 실제 전시실에 들어선 것처럼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다.
NFSA 홈페이지의 이러한 면모가 실은 최근 몇 년간 불어닥친 예산 삭감의 칼바람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의 결과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공동체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NFSA는 지난 기관장 재임 시절 50명 이상의 직원을 해고하고 상설 전시 공간을 폐쇄하는 등 변화와 쇄신의 시기를 거쳤다. 소수의 캔버라 시민 혹은 캔버라를 방문할 여유를 지닌 한정된 호주 국민만을 위한 전시 공간을 포기하고, 호주 연방 117년의 역사?문화 및 일상에 대한 기록을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더욱 ‘민주적인’ 방식으로 제공하는 ‘가상의 전시 공간’, 즉 홈페이지 레이아웃과 온라인으로 활용 가능한 콘텐츠 개발에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이를 위한 선결 조건 중 하나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자료의 디지털화다. 디지털화는 급변하는 영상 및 사운드 콘텐츠의 생산과 배급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대부분의 영상물 아카이브가 직면한 과제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NFSA의 대응 방안 중 하나는 ‘NFSA가 복구한다’는 의미의 ‘NFSA Restores’ 프로그램이다. 호주의 고전 및 컬트영화를 최신 기준에 부합하도록 복원해 동시대 관객들이 감상할 수 있도록 보존하는 프로젝트로, 업계 자문단이 종합적 기준을 적용해 해당작을 선정한 뒤 편당 5만 호주달러에서 15만 호주달러를 들여 디지털 영화로 복원해냈다. 필름을 스캔하고, 스크래치를 지우거나 열화된 색상을 보정하는 화면 복원 및 어긋난 싱크를 바로잡고 잡음을 지우는 사운드 복원을 거친 영화는 2015년부터 현재까지
(1924)부터 휴고 위빙을 국민 배우로 만든 <프루프>(1991)까지 15편에 달한다.
디지털 자료, 오픈 플랫폼에 업로드
이 밖에도 2007년부터 시작된 ‘호주의 소리(Sounds of Australia)’ 프로젝트는 문화적?역사적?미학적인 가치를 지닌 사운드 자료를 디지털 복원한 뒤 전 세계 어디서든 무료로 스트리밍 감상할 수 있도록 오픈 플랫폼에 업로드하고 있다. 현존 호주 최고(最古)의 음향 녹음으로 알려진 피아노 반주와 노래 (1897)부터 아델라이드의 힙합 뮤지션 힐톱 후즈(Hilltop Hoods)에게 최초의 명성을 안겨준 2003년 발매 트랙까지 지난 10년간 126곡에 이르는 소중한 자료가 이 프로젝트의 혜택을 받았다.
세계의 중심인 북반구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리적 특성과 넓은 땅에 흩어진 적은 인구는 역설적으로 신문물을 재빨리 흡수하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얼리 어댑터의 나라 호주는 뤼미에르 형제가 최초로 영화를 상영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카메라를 들여와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유럽 못지않은 무성영화 강국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장편 극영화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켈리 갱 이야기 The Story of the Kelly Gang>(1906)가 (제목으로 짐작할 수 있듯) 호주영화라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와 함께 기억해야 할 점은 1901년 출범한 호주 연방이 1895년 탄생한 영화보다 젊다는 사실이다. 호주의 국가적 정체성이 확립되는 것을 목격하고 기록하면서 다시 공동체의 기억과 상호작용한 주체로서 영상물이 지니는 중요성을 가늠해볼 수 있다. 힘든 시기를 변화의 기회로 삼아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NFSA의 현재는, 그 중요성에 부합하겠다는 의지를 잘 보여준다.
NFSA 공동체 참여 및 교육 팀장 크리스 케네디
“온라인으로도 접근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민주적인가!”
47편의 호주영화와 13명의 게스트가 관객을 만나고, 7회의 워크숍이 진행된 스타스트럭 상영 이벤트. 이를 기획한 NFSA 공동체 참여 및 교육 팀장 크리스 케네디는 행사를 준비한 6개월이 소장 목록을 돌아보고 호주영화의 역사를 대중에게 소개할 방식을 고민하는 좋은 기회였다고 말한다. 3년 전 NFSA에 합류하기 전 그는 영화 배급에 종사했고, 영화 저널리스트로서 『캔버라 타임스』 등에 오랜 기간 글을 기고했다. 또 과학자들의 연구와 업적을 대중의 언어로 바꾸어 전달하는 과학 커뮤니케이터로서 과학영상물 축제, 사이네마 페스티벌(Sci-nema Festival)을 15년간 개최했다. 적어도 캔버라에서, 다양한 관객에게 접근하는 다양한 방식을 고민하는 직책에 그보다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Q 당신이 하는 일을 자세히 소개해달라.
A 소장 자료를 전시회나 상영회 형태로 조직하는 ‘공동체 참여’ 업무 외에 극장?영사실?카페 등의 공간을 운영하는 것도 우리 팀의 일이다. ‘교육’ 업무도 매우 중요한데, 호주 전역의 학생들은 6?7학년에 모두 캔버라를 방문해 국회의사당이나 전쟁박물관 등을 견학한다. NFSA 역시 연간 학생 1만7천 명에게 맞춤 교육을 진행한다. ‘영화 속 원주민 재현 방식의 변화’ 등 5개 프로그램 중 선택할 수 있는데, 초기 영화에서 악당으로 묘사되던 원주민의 이미지가 점차 현실화되고, 이들이 스스로 카메라를 들고 콘텐츠를 제작하기 시작하는 등의 변화를 직접 살펴볼 수 있다. 공간의 한계 때문에 많은 학생을 받을 수 없지만, 몇 년 전에는 NFSA가 캔버라 공기관 중 가장 좋은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기관으로 꼽히기도 했다.
Q 행사나 교육 프로그램의 주된 타깃을 어떻게 설정하나?
A 국가기관으로서 NFSA의 주 고객은 당연히 납세자들이다. 상업적으로 예술영화를 배급하는 극장과 겹치지 않고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을 항상 의식한다. NFSA 건물이 대학 캠퍼스에 위치한다는 것도 중요하다. 이를테면 길 건너편엔 바로 예술대가 있다. 스타스트럭 워크숍 중 하나로 호주의 원로 영화음악가 브루스 스미어튼을 초청했을 때였다. 나 같은 문외한은 알아들을 수 없는 기술 용어가 난무할 때 음대 학생들이 열심히 받아 적는 걸 보고 무척 뿌듯했다.
Q 캔버라 공동체를 넘어설 수 있는, 온라인 활용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다.
A 조만간 팟캐스트를 시작할 계획인데 그때 공개하려고 스타스트럭의 모든 행사를 녹화 중이다. 이용객들이 돈을 들여 캔버라를 방문하지 않아도 우리의 문화유산을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민주적인가(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