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서울역에서 열린 북 마켓에 셀러로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독립출판 문화를 소개하고 제작자들과 독자들이 직접 교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자는 취지로 열린 마켓이었다. 주말에 열린 마켓은 성황을 이뤘고, 놀랍게도 잡지 「브로드컬리」를 알아봐주시는 분이 꽤 있었다. “절박하지만 초연해서 좋았다.” “지극히 현실적인 얘기를 들려줘서 고맙다.” “(책을 읽고) 내 가게를 내려고 준비 중”이라는 분도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다가와 건네는 감사의 인사가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지만 순간순간 마음이 콕콕 쑤시는 게 그분들의 말이 진심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부정할 수 없었다.
「브로드컬리」는 ‘좋은 가게는 오래가면 좋겠다’ 를 모토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로컬 숍들의 솔직한 사정을 인터뷰 형식으로 담아내는 계간 연구지다. 나는 3년째 이 잡지의 포토그래퍼로 일하고 있다. 처음 「브로드컬리」와 연이 닿은 건 SNS를 통해서다. 다니던 증권회사를 그만두고 작은 가게들의 철학을 담은 책을 만들기 위해 준비 중이던 편집장 조퇴계 씨가 취미로 지인들을 찍던 내 사진을 보고 먼저 연락을 줬다. 솔직히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책이 만들어질 수 있을지, 만들어진다 한들 사람들이 과연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이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일지, 만들어진 책이 나를 비롯한 편집부의 생계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분야의 일을 하게 됐다는 사실 말고 무엇 하나 확실한 게 없는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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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전 The Great Passage>(이시이 유야, 2013)은 한 출판사의 전혀 존재감 없는 뒷방 부서인 ‘사전편집부’의 15년간 사전 편찬기를 담고 있다. 영화는 누구나 가기 꺼리는 ‘사전편집부’에 소극적이고 고지식한 영업부 마지메(마쓰다 류헤이)가 투입되면서 시작된다. 그는 “단어의 의미를 알고 싶다는 건 누군가의 마음을 정확히 알고자 하는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사전을 만들어야 한다”는 편집주간의 말에 감동하고 사전 만드는 일에 인생을 걸기로 결심한다. 좋은 사전을 만들기 위해 마지메는 서툴지만 천천히 주변인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려 노력하고, 편집부원들 역시 그를 도와 사전 편찬에 몰두하게 된다.
사진을 찍다 보면 어떤 대상이든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게 습관이 되는 것 같다. 힘들게 낸 네 번째 책을 축하하기 위해 편집부 다섯 명이 전부 모인 어느 밤이었다. 소소하게 둘러 모인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다 문득 오래전 극장에서 본 <행복한 사전>이 떠올랐고, 자연스럽게 「브로드컬리」 편집부와 겹쳐 보였다. 무엇 하나 확실한 게 없이 시작한 그때로부터 3년의 시간이 흘렀고, 그사이 네 권의 책을 냈다. 잡지라고 하기에는 부수가 많은 편이 아니지만 빵집, 동네 서점, 제주의 가게들을 접촉해 일일이 발품을 팔아 찾아다녔고, 한층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가게를 섭외하기 위해 몇 번씩 방문해 인터뷰를 부탁하기도 했다. 거절당하는 건 예사였고, 통장의 잔고는 꾸준히 바닥을 쳤다. 몇 달을 방에만 틀어박혀 녹취를 풀고 「브로드컬리」만의 냉철한 어조로 원고를 다듬었고, 교정을 수도 없이 보고 또 봤다. 이 모든 일이 ‘「브로드컬리」의 마지메’인 퇴계 씨의 몫이었다. 말은 안 했지만 아마도 그는 이 책에 인생을 걸었으리라. 거리를 두고 지켜보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진심이었다.
‘삶의 의미를 알고 싶다는 건 누군가의 삶을 정확히 알고자 하는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잡지를 만들어야 한다.’
「브로드컬리」에 소개된 저마다 다른 개성을 지닌 로컬 숍의 운영자 분들을 만나면서 느낀 분명한 한 가지는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으려 애를 쓴다는 것이다. 마지메와 퇴계 씨에게서도 느낄 수 있었던 바로 그것. 현재를 견디는 아름다운 고지식함 말이다. 나는 오늘도 거리를 두고 만나는 모든 이로부터 배우고 있다.
<행복한 사전> 사전편집부는 결국 15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대도해’라는 언어의 바다를 건너는 배 한 척을 완성해낸다. 출판기념회를 연 날, 마지메는 말한다. “내일부터 개정 작업에 들어가야겠군요.” 아마 퇴계 씨도, 「브로드컬리」 편집부도 동의할 것 같은 대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