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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코어: 영화음악의 모든 것> 들리지만 듣지 않았던 것들에 대하여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라디오 영화음악 프로그램을 만들며 파악한 ‘한국인이 사랑하는 영화음악’ 리스트가 있다. 리처드 샌더슨의 ‘Reality’(<
    라 붐>), 제시카의 ‘Goodbye’(<약속>), 엘비스 코스텔로의 ‘She’(<노팅힐>) 등은 오래된 단골 신청곡이고, 최근 몇 년 사이엔 아담 르바인의 ‘Lost stars’(<비긴 어게인>)나 이디나 멘젤의 ‘Let it go’(<겨울왕국>)가 매주 등장한다. 공통점은 모두 가사가 있는 노래라는 것. 영화의 정점에서 배경음악으로 흐르거나 주인공이 직접 부르는 방식으로 등장하는 이 노래들은 작품을 기억하는 가장 강렬한 청각적 표지로 각인된다.

    그러나 옷에 붙은 상표가 결코 그 옷이 될 순 없듯, 대표되는 주제곡이나 삽입곡 한두 곡을 그 작품의 영화음악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극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관객의 감정을 이끈다’는 영화음악의 본래 목적을 수행하는 건 정작 노래가 아닌 ‘스코어’이기 때문이다. ‘점수’ ‘악보’ 등의 뜻으로 알려진 ‘스코어’는 영화의 세계로 오면 ‘영화를 위해 작곡되는 연주음악’으로 통용된다. 영화 시상식 ‘음악상’이 바로 이 영역에 수여하는 상이다. 주제가가 옷의 전면에 박혀 있는 브랜드 로고라면, 스코어는 옷의 원단이자 디자인, 색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스코어는 주제가보다 인기가 덜할까? 그건 의도적으로 스코어가 기억하기 어렵게 설계돼 있기 때문이다. 영화음악 작곡가들은 ‘음악은 영화 뒤에 있을 것’을 철칙으로 삼는다. 음악이 앞서면 그 순간 영화는 뮤직비디오가 되고 말 테니까. 가사가 없다는 점도 관객이 스코어를 기억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지만 덕분에 관객은 대사나 음향에 귀를 더욱 기울일 수 있다. 의식하지 못하는 선에서 관객의 감정을 지배하도록 만들어진 음악이기에, 스코어는 오랜 시간 ‘들리지만 듣지 않았던’ 음악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확성기를 연결한 사람이 있다. 미국 CBS 방송사 PD이던 맷 슈레이더다. 영화광인 그는 영화의 여러 요소 중 음악에 특히 매료됐다. 영화로부터 받은 상당 부분의 감동이 음악에서 나왔다고 여기고, 영화음악의 어떤 점이 사람을 울고 웃기는지 파헤쳐보기로 한다. 시장 규모나 인기 요소가 결코 작지 않음을 파악한 뒤 영화음악을 조명해야겠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한국에선 2017년 10월 개봉한 장편 다큐멘터리 <스코어: 영화음악의 모든 것 Score: A Film Music Documentary>이다.

    영화는 말 그대로 스코어의 모든 것을 담고자 한다. 무성영화 시절부터 시작해 영화음악의 역사를 훑는 동시에, 대중은 알기 힘든 구체적인 제작 과정도 공개한다. 수십 명의 영화음악가를 인터뷰하며 영화음악만이 지닌 특성을 설명하는 것은 물론 신경과학자의 입을 통해 음악이 어떤 경로로 우리 감정에 영향을 끼치는지도 분석한다. 흥미로운 지점은 오직 영화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영화음악의 중요성을 설파한다는 것이다. 버나드 허먼의 음악을 지운 <싸이코 Psycho>(알프레드 히치콕, 1962)의 샤워 신을 보여준 게 대표적인 예다. 음악이 들어간 신과 제거된 신을 나란히 보며 그 잔인한 장면이 얼마나 안 무서울 수 있는지 체험하다 보면 구구절절한 해설 없이도 스코어의 영향력을 납득하게 된다.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는 역시나 음악 그 자체다. 존 윌리엄스가 작곡한 ‘Flying Theme’(<E.T>), 벨 콘티의 ‘Gonna fly now’(<록키>), 토머스 뉴먼의 ‘Shawshank Redemption’(<쇼생크탈출>), 마이클 지아키노의 ‘A Married Life’(<>) 등 수많은 영화음악 명곡이 등장할 때마다 관객은 감탄할 수밖에 없다. 듣는 순간 가슴이 먼저 반응하는 곡들, 심지어 해당 영화를 보지 않더라도 광고나 방송을 통해 수없이 들어온 음악이기 때문이다.

    가끔 신청이 들어오지 않더라도 먼저 스코어를 선곡해 틀 때가 있다. 가사 없는 음악이 낯설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달리 반응은 언제나 뜨겁다. 단지 이름표를 붙이지 않고 있어 몰랐을 뿐, 만나면 반가운 존재라는 걸 확인하는 기회다. 스코어를 그냥 지나치는 건 어쩌면 한쪽 귀만 열고 영화를 만나는 것과 같을지 모른다. 나머지 한쪽 귀를 열어보시길. 영화의 세계 안에 숨어 있던 신대륙을 만날 것이다.  

     
    by.최다은(SBS 라디오PD,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 팟캐스트 <김혜리의 필름 클럽>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