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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해성의 <역도산>: 징글징글한 육탄전의 기록

    배우
    설경구는 영화가 자신을 먹어치울 때까지, 온전히 삼킬 때까지 머리를 내놓고 달려드는 미련한 짐승이다. <역도산>은 배우 설경구의 미련할 만큼 끈질긴 뚝심을 볼 수 있는 영화다.

    배우의 얼굴은 영화를 기억하는 단위다. 나에게 영화 <역도산(力道山)>(송해성, 2004)은 ‘리키도잔(力道山)’으로 불린 조선인 프로레슬러 김신락의 일대기를 다룬 파란만장한 드라마가 아니라, 배우 설경구의 고통으로 일그러지던 얼굴의 집합체로 기억되는 영화다. “전 스모를 하고 싶어요. 난 도둑질이나 하는 조센징이 아닙니다”라며 억울하게 울먹이는 순간에도, “일본에 왔더니, 웃을 일이 없더라. 아이, 웃어서는 안 되겠더라구. 가난한 조센징이 뭐가 좋아서 웃고 다니냐”며 자조하는 순간에도, “딱 한 번 사는 인생, 착한 척할 시간이 어디 있냐”며 위악적인 미소로 거들먹거리던 순간에도, 이 배우의 얼굴엔 고통이 흐르고 있다. 머리통이 피투성이가 된 채 링 위를 휘청거리며 쓰러졌다가도 다시 입에 흰 거품을 물고 일어서 포효하던 징글징글한 독종. 성공하면 웃을 수 있다고, 아니 웃으려면 성공하자고 했지만 웃는 얼굴에조차 회복될 수 없는 통증이 서린 사내. 미워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는 설경구의 고통스러운 얼굴이 곧 영화 <역도산>이다.
    “난 일본이고, 조선이고, 그런 거 몰라. 난 역도산이고, 난 세계인이다.” ‘조센징’이라는 과거를 지우고 17세에 현해탄을 건너와 스모 선수가 된 김신락은 이후 태평양을 건너가 익힌 프로레슬링 기술로 전후 일본의 영웅, ‘역도산’이 되었다. 그의 기막힌 가라테촙에 미국에서 온 거인들이 링 위에 쭉쭉 나자빠질 때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의 국민은 “자존심을 되찾고” “복수를 대신” 하는 기분을 맛보았다. ‘일본, 역도산’ 이라는 주소로 편지를 보내면 배달이 되고, “천황 아래 역도산”이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역도산은 슈퍼스타였고 ‘위대한 쇼맨’이었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모사꾼에 사기꾼, 콤플렉스로 가득 찬 폭력적인 링 위의 연예인일 뿐이었다.
    <오아시스>(이창동, 2002)의 앙상한 종두에 이어 <실미도>(강우석, 2003)에서의 지옥 훈련을 마친 설경구는 100kg이 넘는 집채만 한 거구의 역도산으로 몸집을 불렸다. 카메라 트릭이 허용되지 않는 치열한 프로레슬링 훈련에 돌입했고, 영화 전체에 깔리는 일본어 대사를 완벽하게 소화했다. 곱슬거리는 왼쪽 머리를 무심히 쓱 쓸어 올리던 역도산의 사소한 동작까지 고스란히 재현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 배우는 역도산을 링 위의 화려한 엔터테이너나 한 시대를 주름잡은 거대한 영웅으로 소환하지 않는다. 그가 스크린 위로 부활시킨 역도산은 “정신적인 장애를 안고 살아간, 마음이 아주 가난했던” 그래서 서른아홉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산 어떤 가련한 인간이었다. 영화를 연출한 송해성 감독은 “촬영을 시작하고 매 신(Scene), 설경구가 하는 연기를 보면서 저놈 참 나쁜 놈, 저놈 참 불쌍한 놈. 설경구가 웃으면 기쁘고, 설경구가 울면 슬퍼졌다. 지금은 설경구가 하지 않은 역도산을 상상하기가 힘들 정도다. 영화를 찍으면서 이렇게 자주 감상적이 된 적이, 울컥울컥 감정이 올라온 적이 없었을 정도였다”고 회상한다.
    배우 설경구는 영화가 자신을 먹어치울 때까지, 온전히 삼킬 때까지 머리를 내놓고 달려드는 미련한 짐승이다. 세상의 때와 오물에 전 남자들,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꼴통 같은 동물성의 사내들을, 세상이 그놈들을 버려도 세상 끝까지 품고 뒹구는 배우다. 반세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난 타국의 프로레슬러, 일면식도 없는 사자(使者)의 인생을 스크린 위로 복기하던 이 배우는 살짝 발끝을 담그는 대신 달려가 그 속으로 풍덩 빠져들어버렸다. 슬쩍 잽을 날려서 간을 보는 대신 온몸으로 돌진해 안아버렸다. 배우 설경구의 미련할 만큼 끈질긴 뚝심이, 치켜뜬 눈빛으로 머리통을 베어버릴 것 같은 역도산의 살기와 고통이 스크린 위에서 부둥켜안고 싸운 징글징글한 육탄전의 기록. 그것이 바로 영화 <역도산>이다.  
    by.백은하(백은하연구소 소장, 영화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