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청원순(Yunshun Chung)
계획된 문화예술 마을 일본 고베 신나가타
하루에도 수십 편의 비행기가 우리나라 사람들을 태우고 한국과 일본을 왕래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오사카?고베?교토?나라와 연결되는 간사이 국제공항의 출입국 기록에 따르면, 재작년 일본 간사이 지역을 방문한 600만여 명의 외국인 중 한국인 수는 무려 16만여 명이 넘어, 단연 1위였다고 한다. 한국과 물가 차이도 크지 않을뿐더러 물리적 위치 또한 가까운 만큼 이동에 드는 수고도 덜해 한국인이 즐겨 찾는 해외 여행지가 바로 일본 간사이다. 간사이 지역은 오늘 소개할 필름 아카이브가 있는 곳이다.
오사카에서 급행전철로 30여 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항구도시 고베. 고베 항은 1868년 개항한 일본의 주요 국제무역항 중 하나로, 항구 주변 거리는 예부터 외국인들의 거류지였다. 현재도 고베시 산노미야 주변은 유럽인이 살던 동네나 차이나타운 등 옛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어 일본스러움과는 또 다른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느껴지는 곳이다. 그런 고베에 애니메이션, 만화, 영화, 연극 등 문화예술이 공존하는, 또 다른 특별함을 지닌 동네가 있다. 바로 고베 시영지하철과 JR전철이 지나는 신나가타 역 주변이다. 1995년, 한신 대지진으로 많은 피해를 본 이 동네는, 지진 피해 복구의 일환으로 고베시의 재개발 중점 지구로 선정되어 계획적인 문화예술마을이 되었다. 댄스 스튜디오, 애니메이션 제작 공방, 소극장 등 예술 활동 시설이 자리하고 있고, 매주 다른 다양한 문화예술 이벤트를 개최하는 등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민관이 힘을 합쳐 마을 살리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신나가타 역 바로 옆 와카마쓰 공원(일명 ‘철인광장’)에 설치되어 있는 만화영화 <철인 28호>의 실물 크기 로봇은 이 동네의 명물이다. 이런 것들 사이에서 다른 것보다 조금 더 반짝이는, 특별한 필름 아카이브가 있다. 일본 정식 명칭은 ‘고베 에이가 시료칸(고베영화자료관)’. 영문 시설명은 ‘Kobe Planet Film Archive’로, 때로 별칭처럼 ‘고베 플래닛’이라 불리기도 한다.
일본 유일의 사설 필름 아카이브
고베영화자료관의 특별함은 그 시작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료관의 역사 그 자체에 담겨 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국가 사업으로 만들어진 여타의 국공립 아카이브와 달리, 이곳은 사비를 들여 만든, 필름 수집가들의 컬렉션으로 시작된 아카이브이기 때문이다. 1974년, 영화를 좋아하던 청년 몇 명이 우연한 기회로 얻게 된 무성영화 필름을 계기로 필름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름을 붙였다. 그 이름은 ‘플래닛 영화자료 도서관’. 수십 년에 걸쳐 수집한 필름은 2007년, 지금으로부터 11년 전 ‘고베영화자료관’이라는 이름의 정식 아카이브로 개관하게 되었다. 관장인 야스이 요시오 씨는 플래닛 영화자료 도서관을 만든 ‘영화를 좋아하는 몇 명의 청년’ 중 한 명이다. 친구들과 함께 시작한 필름 수집이었지만, 삶이 주는 각자의 고단함을 모두 나눠 가질 수는 없기에, 그들의 필름에 대한 애정을 대표해 야스이 관장이 필름 수집에 인생을 쏟기로 했다. 필름 수집가들로부터 저렴한 가격에 구입하거나 소장자로부터 버려지는 필름을 받아오는 등, 수십 년간의 수집 활동이 쌓여 지금의 자료관이 만들어졌다.
개인 수집을 통해 만들어진 아카이브인 만큼 규모나 시설 면에서 크거나 화려하거나 세련되진 않다. 하지만 작다고 결코 무시할 순 없다. 필름 보존고, 비필름 자료 보존고, 필름 조사실, 영화상영관, 사무실과 로비에 마련된 작은 카페 공간까지. 최소한의 공간으로 최대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특히 자료 수집에서는 어디와도 비교할 수 없는 열정으로 가득하다. 플래닛 영화자료 도서관 시절, 상영회를 목적으로 무성영화나 일본 애니메이션 필름을 수집하기 시작했는데, 점차 그 범위가 넓어졌다. 장르를 막론하고 모든 영상 필름, 그리고 영화에 관련된 모든 비필름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보존 중인 필름도 기록영화, 교육영화, 극영화 등 다양하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세계 각국의 영화필름이 보존되어 있다. 무려 2만 캔이 넘는(작품 수로는 약 1만 6000편 정도가 있다) 필름과, 수많은 비필름 자료가 있고, 그중에는 <해방뉴-쓰>(1946)를 비롯해 영화 <해연>(이규환, 1948) 등 이전에 한국에 없던 한국 필름 자료도 있다(현재는 필름 복사본을 제공받아 한국영상자료원에도 보존 중이다).
필자가 취재를 위해 방문한 날도, 우연히 엄청난 순간을 마주할 수 있었다. 새롭게 들어온 필름 자료를 검사?조사하는 조사실 견학 중 기사님으로부터 이번에 들어온 자료라며 하나의 작은 필름 상자를 건네받았다. 1930년대 것으로 추정되는 8mm필름이 들어있는 상자였는데, 그 상자에는 정갈한 손글씨로 <평양 사동 전경>이라 쓰여 있었다. 식민지 시기 조선에서 촬영된 필름 상자라니! 필름 조사 전이라 상자에 표기된 것과 내용물이 일치한다고 단정지을 수 없지만, 상자와 안에 들어있는 필름이 같은 것이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이렇듯 야스이 관장을 비롯한 고베영화자료관 구성원들의 무한한 필름 사랑으로 한국, 대만 등 해외의 새로운 필름 발굴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신작 공개와 함께 열리는 특별 기획전
자료 수집뿐만 아니라, 고베영화자료관에서는 다른 시네마테크처럼 영화 상영회도 열고 있다. 평일 상영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매주 주말 상영을 원칙으로, 많게는 한 달에 세 가지 기획, 적어도 매달 한 번씩 갱신되는 기획전이 3개월 후의 상영까지 예정되어 있다. 기획전 테마는 보유 필름을 소재로 삼아 정하거나, 이용자의 요청을 받아 기획되기도 한다. 상영회는 필름 상영에 적합한 자료관의 특성상 필름 마니아들이 필름 영화를 볼 수 있는 더없이 소중한 기회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디지털 상영을 하기도 한다. 그중 고베영화자료관에서만 할 수 있는 상영 기획이 있다. 바로 신작 공개와 함께 구작을 상영하는 감독 기획전인데, 일반 영화 상영을 목적으로 하는 단관 극장이나 멀티플렉스 극장에 비해 상영 스케줄이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에 가능한 기획이다. 고베 지역에서 개봉관을 확보하지 못한 감독에게 신작 개봉 기회와 함께 감독의 이전 작품을 상영하는 특별한 기회를 제공한다. 이렇게 미개봉작 상영과 함께 시네마테크의 기능도 수행하는 것이다.
4년 전부터 일본 문화청의 지원금을 받아 데이터베이스 구축과 발굴 및 조사·복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사설 아카이브인 만큼 자료관 운영비가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 그 때문에 한 달에 한 번은 원하는 단체에 장소를 대관해주는 대관 상영도 하고 있다.
이국적인 정취와 고베 항에서 바라보는 화려한 야경을 즐길 수 있어, 관광지와 데이트 장소로서 사랑받는 고베. 이번 여행은 고베영화자료관의 작은 시네마 카페 ‘체리’에서 맛보는 달콤한 밀크티와 함께 필름 영화 한 편을 챙겨 보는 또 다른 로맨틱한 여행을 해보는 게 어떨까.
INTERVIEW 고베영화자료관 관장 야스이 요시오
“나에게 필름이란, 영화를 영화답게 만들어주는 매개체”
Q 이렇게 많은 필름을 수집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A 학창 시절, 영화를 보는 것이 생활이었고 오락이자 낭만이었다. 나는 영화 보기를 좋아하는 학생이었고, 대학 시절에는 영화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당시 신작 영화는 영화관에서 볼 수 있었지만, 오래된 영화는 접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래서 대학 졸업 후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모여 취미 삼아 옛날 영화를 보는 상영회를 열었다. 상영을 위해 영화사에서 필름을 대여하고 반납하는 과정을 거치는 중 한 무성영화 변사로부터 필요 없어진 필름을 사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게 됐다. 그걸 싸게 산 것이 필름 수집의 시작이다. 그 영화가 바로 나의 보물 1호다. 오래된 시대극인데, 반도 쓰마사부로(阪東妻三?)가 주연한 <에도 가이조쿠덴 가게보시 江?怪賊? 影法師>(1925)라는 영화다.
Q 필름 수집 과정이 궁금하다.
A 예전에는 필름을 수집하는 수집가가 몇 명 있었다. 이미 그들은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웃음). 그들은 대체로 본인이 좋아하는 필름만 모으고 필요 없는 건 팔았다. 일명 ‘찬바라 영화’라는 칼싸움하는 시대극을 좋아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따라서 그 외의 기록영화 같은 건 아주 싸게 살 수 있었다. 무료로 받은 것부터 싸게는 1000엔, 가장 비싼 건 30만 엔 정도 했다. 뉴프린트 필름에 비하면 10분의 1도 안 되는 싼 가격에 살 수 있었던 거다. 한국 필름도 같은 방법으로 찾았다. 처음 한국영상자료원에 제공한 필름은 <해방뉴-쓰>인데, 그것 역시 교토에 살던 한 수집가에게서 구입한 필름이다. 수집가는 대개 고물상이다. 그 외에도 고물상에서 필요 없는 필름을 사들이다 보니 한국 필름이 나오게 됐다.
Q 지금도 수집은 계속되고 있나.
A 그렇다. 지금은 기증이 대부분이다. 사실 구입하고 싶지만 돈이 없어 어려운 현실이다(웃음). 그래서 극히 한정된 것밖에 수집할 수 없는데, 무료로 받는 필름은 장르?제작 국가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 받아온다.
Q 앞으로 꼭 수집하고 싶은 필름이 있나.
A 수없이 많다. 그중 꼽으라면 야마나카 사다오(山中貞雄) 감독의 영화를 꼭 수집하고 싶다. 그의 작품은, 아직 영화 전체 형태로 제대로 남아있는 필름이 없다. 1~2분 길이의 필름이 몇 개 남아있는 정도다. 응원 감독으로 참여한 영화필름은 한 작품 전편이 도쿄 필름 아카이브에 보존되어 있긴 하다. 야마나카 사다오 감독의 영화는 필름 수집가라면 모두 꿈에 그리는 대상이다.
Q 관장님에게 필름이란 어떤 존재인가.
A 철학적인 질문이라 조금 어렵다. 필름은 나에게 영화를 영화답게 만들어주는 매개체다. 내가 어려서부터 봐온 영화는 모두 필름이었다. 그 때문인지 디지털로 만들어진 영화는 한 구석이 비어 있는 느낌이다. 디지털 영화는 필름 영화와는 또다른 매력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디지털 영화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또 다른 영화의 매력을 찾고자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