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영상자료원연맹(FIAF)이 전 세계 필름 아카이브 연맹이라면, 지리적으로 인접한 아카이브 간 긴밀한 교류협력을 위한 지역 공동체도 있다. SEAPAVAA는 동남아시아?태평양 지역 시청각 아카이브 연합으로, 이 지역 시청각 유산의 아카이빙과 활용을 촉진하고 아카이브 간 협력을 도모하기 위해 1996년 설립되었다. 한국영상자료원은 SEAPAVAA 행사에 참관인 자격으로 참석해오다 지난해 정회원으로 가입을 신청했다. 그리고 지난 4월 8일, 이에 대한 회원 가입 승인 투표가 이루어지는 27차 SEAPAVAA 총회 및 심포지엄이 태국 방콕에서 열렸다.
마침 우리나라 설 명절에 해당하는 송크란 기간을 며칠 앞두고 방콕 시내는 한껏 들떠 있었다. 태국에서 1년 중 가장 뜨겁다는 4월의 햇볕이 내리쬐는 가운데, 주요 일정 중 하나인 SEAPAVAA 심포지엄이 시작됐다. 올해 심포지엄에서는 ‘경계를 넘어선 시청각 아카이브’를 주제로 기술적?지리적?사회적 의미의 경계를 넘는 다양한 아카이브 사례 발표와 발제가 이어졌다. 자연 재해를 입은 지역에 투입된 아카이브 국제 구호단, 지역 라디오 방송 아카이브의 복원을 위해 쿠바 현지인들과 동고동락한 미국 프로젝트는 지리적 경계를 넘는 아카이브의 사례를 보여주었다. 일본의 홈무비 수집 등 주변부 목소리를 듣기 위한 시도, 지역 도서관과 제휴해 자료의 도달 범위를 확대한 아카이브의 사례 등이 다양하게 소개됐다. 이외에도 아키비스트들의 사회참여, 각종 아카이빙 표준의 개방, 아카이브 컬렉션에 대한 공동의 목록 조사 등 아카이브의 역할 범위와 영향력에 대한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매일 저녁 진행된 ‘아시아 복원 영화 상영전’도 일정의 묘미 중 하나였다. 상영 장소는 번화가 중심에 위치한 멀티플렉스 영화관인 리도 시어터(Lido Theater)로, 1970년대 양식의 간판이 이색적인 정감을 불러일으켰다. 디지털 복원의 중요 사례로 꼽히는 필리핀 영화 <인샹 Insiang>(1975),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감독의 <
지옥문 Gate of Hell>(1953) 등이 관객을 만났고, 각 아카이브가 보유한 컬렉션 중 역사적 가치가 높은 짧은 영상을 모아 상영하는 아카이벌 젬스 스크리닝(Archival Gems Screening) 섹션이 이어서 진행됐다. 각 영상 상영 전 아카이브 관계자들의 짤막한 소개가 곁들여져, 마치 각 지역의 보존고를 탐방하는 여행자가 된 기분이었다.
이틀간의 심포지엄이 끝난 다음 날, 드디어 기다리던 총회가 열렸다. SEAPAVAA 집행부와 회원사들은 안건이 빼곡히 적힌 두꺼운 책자를 한 장씩 넘겨가며 회원과 재정 현황을 공유하고 규칙 개정, SEAPAVAA 시상식 추진 절차 등에 대한 토론과 의결 투표를 진행했다. 이제 막 청년기를 지나고 있는 국제기구인 만큼 의사 결정 과정은 길고도 까다로웠다. 대망의 회원 승인 투표 순서. 한국영상자료원의 보존고와 컬렉션 현황 소개와 간단한 피칭 발언이 끝나고 거수 투표 결과, 만장일치로 정회원 신청이 승인되었다. 준회원이던 대만영화원(Taiwan Film Institute)도 올해 정회원 승격 신청이 승인되어 한국영상자료원과 정회원 동기가 되었다.
다음 날, 직원들의 인솔하에 방콕 도심에서 차로 40분 거리의 태국 필름 아카이브를 찾았다. 방콕 시민의 입장에서 교통은 다소 불편해 보였지만, 탁 트인 녹지 안에 시네마테크 영화관, 박물관, 그리고 각종 체험 및 관람 시설이 펼쳐져 있어 마치 작은 영화 마을에 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특히 영화박물관은 실제 사용되던 영사 장비, 편집 도구 등 옛 장비와 소품들이 영화 제작 단계별로 전시되어 어떤 영화박물관에서도 보기 어려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옆에서는 올해 완공을 앞둔 새로운 센터의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공사가 완료된 보존고와 작업 공간 일부를 견학할 수 있었다. 태국 영화 유산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세심한 발걸음을 내딛는 직원들의 기대감이 피부로 느껴졌다.
이번 총회에서 만난 사람들은 아카이브의 사명과 역할을 함께 고민할 수 있는 든든한 친구들이었다. 실제로도 한국영상자료원은 잃어버린 한국영화필름을 찾거나 현지 조사를 할 때 아시아 지역의 아카이브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아왔다. 지리적으로 인접하고 문화적 토양을 공유하는 아카이브들이 힘을 모으면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SEAPAVAA 회원사들과 함께할 미래가 기다려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