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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리 예찬: 시네마테크KOFA 영화와 공간 파리

    시네마테크KOFA는 2015년부터 <
    영화와 공간>이라는 이름으로 특정 도시를 주제로 다룬 프로그램을 선보여왔다. 영화 속 공간의 풍경과 그 변화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이전과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영화를 즐기는 재미를 선사하는 <영화와 공간> 올해의 도시는 바로 파리다. 이번 여름, 스크린을 경유해 영화가 시작된 곳이자 모든 이에게 꿈의 도시인 파리를 함께 여행해보자.

    120년이 넘는 영화사 내내 파리는 국적을 불문하고 수많은 영화인을 끊임없이 매혹해온 공간이다. 비단 시네필뿐일까. 조금 과장하자면, 누구에게나 파리는 프랑스 수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에펠탑, 샹젤리제 거리, 개선문, 알렉상드르3세 다리 아래로 흐르는 센강…. 다들 파리에 대한 자신만의 판타지 하나쯤은 품고 있을 것이다.

    프랑스인들에게도 파리는 영감을 불어 넣는 뮤즈와도 같은 공간이다. 에펠탑이 보이는 집을 구하고 그렇게도 행복해했다는 프랑수아 트뤼포는 <400번의 구타 The 400 Blows>(1959)를 여는 에펠탑 시퀀스에서부터 파리를 향한 엄청난 애정을 당당하게 고백한다. 앙리 랑글루아에 대한 헌사로 시작해 또다시 에펠탑으로 시선이 향하는 <훔친 키스 Stolen Kisses>(1968)에서의 파리는 청년이 된 앙투안 드와넬의 탐정 놀이를 위한 신나는 놀이터가 된다. <마지막 지하철 The Last Metro>(1980)까지 이어지는 파리 사랑을 보고 있노라면 트뤼포에게 파리는 영화와 동의어인 것 같다.

    장 뤼크 고다르의 파리도 젊음의 에너지로 넘친다. <네 멋대로 해라 Breathless> (1959)의 진 세버그가 “뉴욕 헤럴드 트리뷴!”을 외치고 장 폴 벨몽도와 함께 샹젤리제 거리를 걸어 내려오는 모습은 누벨바그의 키치적 상징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이렇게 누벨바그의 파리는 청춘 그 자체다. 다른 한편에는 장 피에르 멜빌의 비정한 도시, 파리가 있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일관되게 지켜온 멜빌에게 파리는 뉴욕 못지않은 누아르적 공간이다. <암흑가의 세 사람 The Red Circle>(1970)의 카메라는 시테섬부터 방돔 광장까지 건물의 안과 밖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파리의 구석구석을 은밀하고 치밀하게 훑는다.

    동료 감독들이 파리에 특별한 아우라를 불어넣었다면, 에릭 로메르에게 파리는 일상의 공간이다. 이상형을 찾아 헤매던 17구의 작은 골목들(<몽소 빵집 The Bakery Girl of Monceau>(1963)), 젊음의 동네 카르티에 라탱(<수잔느의 경력 Suzanne’s Career>(1963)), 모두가 항상 바쁘게 스쳐 지나가는 생라자르 역 주변까지(<하오의 연정 Love in the Afternoon>(1972)), 파리지앵의 일상적 장소들은 카메라에 무심하게 담긴다. 자신의 사랑 표현이 부족하다고 느꼈던 것일까, 로메르는 말년에 <파리의 랑데부 Rendezvous in Paris>(1995)를 통해 파리를 향해 진하게 오마주를 바치기도 한다. 로메르가 파리를 따뜻한 일상의 공간으로 포착했다면, 필립 가렐의 파리는 권태로운 일상의 공간이다. <인 더 섀도우 오브 우먼 In the Shadow of Women>(2015)의 첫 장면은 벽에 기대 바게트를 뜯어 먹는 건조한 표정의 남자를 비춘다. 이어서 우리는 파리의 지저분한 뒷골목,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은 아파트, 흔하디흔한 카페와 타바(카페에 속해 있는 작은 가판대로 담배, 우표 등을 판매한다)를 질리도록 구경한다. 우리가 알던 아름다운 파리 대신 권태에 찌든 부부의 불륜 행각이 펼쳐지는 구질구질한 파리가 있다.

    프랑스 감독들이 이럴진대 외국 감독들은 어떻겠는가. 할리우드 영화에서 가장 많이 재현된 도시가 바로 파리다. 그동안 800편이 넘는 미국 영화가 파리에서 촬영되었거나 파리의 모습을 재현한 스튜디오 세트에서 촬영되었다. 에른스트 루비치는 “파라마운트의 파리가 있고 MGM의 파리가 있다. 그리고 진짜 파리가 있다”고 말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파리는 꿈이다. 주인공들은 에펠탑에 취하고, 카바레의 흥겨움에 취하고, 가로등이 불빛을 비추는 센강에 취하고, 사랑에 취한다. 빈센트 미넬리의 <파리의 미국인 An American in Paris>(1951)은 파리를 배경으로 하는 할리우드 영화에 모범적인 원형을 제시한다. 혼을 쏙 빼놓는 진 켈리의 춤은 파리의 골목골목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이 영화의 백미인 센 강가에서 추는 왈츠 장면은 12년 후 <샤레이드 Charade>(1963, 스탠리 도넌)에서 오드리 헵번의 대사를 통해 다시 한번 칭송된다. <샤레이드>에서 파리는 미스터리와 로맨스가 공존하는 매력적인 공간이다. 이제는 현대식 쇼핑몰이 되어버린 레 알의 옛 풍경, 캐리 그랜트가 터프하게 싸우던 오스만 스타일의 회색 지붕, 그리고 센 강가에서 키스하는 연인들의 풍경 등 스탠리 도넌은 파리의 팔색조 같은 이미지를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이처럼 파리는 누군가에게는 청춘, 누군가에게는 사랑 혹은 미스터리,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다. <영화와 공간: 파리>를 통해 우리는 나의 파리를 공유하고 타인의 파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자, 당신의 파리는 무엇입니까?  
      by.이선우(파리 10대학 박사, 서울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