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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의 모국어 영화 ‘대만어 영화(台語片)’
지난 호 「영화천국」 ‘인물 포커스’ 코너에서는 대만영상자료원(TFI) 첸핀촨 원장을 만나 TFI가 주력 발굴, 수집하고 있는 ‘대만어 영화’(58호에서는 ‘대만 다이얼렉트 시네마’로 표기)에 대해 간략히 소개했다. 첸핀촨 원장은 이 영화들을 일컬어 “대만의 정체성을 영화적 차원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언급하며, TFI가 실시하는 영화 수집 사업의 뚜렷한 지향점을 드러냈다. 필름 속에 담긴 과거의 기억을 찾고 당시의 시대상을 그려보는 작업은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한다. 이는 한국영상자료원을 포함한 수많은 해외 아카이브에서 영화 발굴 및 수집 사업을 지속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번 호 ‘해외통신’에서는 우리와 비슷한 듯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는 대만의 과거 영화계 일면을 들여다보고, 타 영화 기관이 실시하는 수집 사업의 근간을 공유해보고자 한다.
오래된 필름 인화실의 다락방에는 담보로 저당 잡히거나 예전 주인이 보관 중인 필름이 많이 있다. 이곳은 25년간 호황을 누린 대만어 영화가 자리 잡은 안식처다. 이외에도 길거리 상영자의 창고에 보관되어 있거나 제작자의 베란다에 쌓여 있는 영화도 있다. 이처럼 잊힌 옛 필름은 대만영상자료원(國家電影中心, Taiwan Film Institute, 이하 ‘TFI’)의 첫 번째 보물이 되었다.
38년에 걸친 계엄령이 1990년대에 해제되면서 대만 사회 각층 의 사람들은 더욱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갈 준비 를 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지식인들은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되묻기에 급급했다. TFI가 보관 중인 필름은 엔터테인먼 트 산업이 빠르게 발전하는 가운데 잃어버린 영상들로, 마치 대만 사회가 과거에 잃어버린 한 조각의 퍼즐처럼 짧은 겨울잠 속 기억들과 함께 재발견되기 시작했다.
대만어 영화는 대만에 있는 중국인의 모국어, 즉 대만어로 녹음 된 영화(객가어 지역에는 객가어 영화도 있지만, 수량이 적기 때문에 모두 대만어 영화에 포함되었음)를 말하는데, 대만 영화 산업의 특징은 제작 규모나 방영 루트 등에 있어 국가 정책의 보조를 받는 중국 본토 영화와 많이 다르다. 대만어 영화는 1956~1972년 사이에 성행했으며 25년 동안 총 1,200편 이상 제작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텔레비전의 보급, 자막 식별률의 상승, 모 국어 관객의 급감에 따라 생산량이 빠르게 감소하다 1981년에 완전히 사라졌다. 1989년 허우 샤오시엔(侯孝賢)의 영화 <비정성시 悲情城市>가 혜성처럼 나타나면서 영화 속 배우들은 더 이 상 자연스럽지 못한 언어로 말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며, 대만어 영화는 공식적으로 더 이상 언어를 기준으로 분류되지 않았다.
대만의 모국어 영화 ‘대만어 영화’의 탄생
대만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식민지 시기를 겪었지만,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동족(同文同種)의 조국을 맞 이하지 못하고 인지적 차이가 큰 새 정부를 맞이했다는 점이 한국 과 다르다. 새 정부는 중국 내전에서 연이어 패하고, 대만 사람들을 동원해 또 다른 전쟁의 후방 기지로 삼았다. 당시 대만 민간에 서는 자체적으로 영화를 제작할 능력이 부족했고, 중국에서 이전 해 온 공공 영화제작소는 자원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나라를 부흥시키는’ 정치적 홍보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대만 본토 사람들은 바다 반대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내전에 관심이 없었고, 언어도 통하지 않아 이런 영화는 늘 흥행에 실패했다. 이 시기에 홍콩에서 제작한 하문어(廈門語) 영화가 대만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문어와 대만어는 아주 비슷 했기 때문에 그들이 만든 이야기는 대부분 대만 관객에게 익숙한 소재였다. 그러나 홍콩에서 제작한 하문어 영화는 동남아의 복건어(福建語) 문화권을 겨냥해 제작되었기 때문에 영화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결국 현지 문화와의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이 시기에 영화 관련 산업에 종사하던 배우, 상인, 기술자, 지식인 들은 모두 ‘모국어를 사용해 대만의 이야기를 하는 영화를 자체 제작해 관객에게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 었다. 대만어 영화는 이렇게 탄생했다.
대만어 영화에 대해 말할 때 대만 현지에서 유행하던 전통 희곡 ‘가자희(歌仔?)’를 빼놓을 수 없다. 여러 지역의 전통 희곡과 마 찬가지로 가자희에서 공연하는 이야기는 대부분 민간에 전해 내 려오는 것으로 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전 서민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오락이었다. 극단 사람들은 주로 공연 시기에 따라 단체로 이동하고 공연하면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대가족처럼 지냈 다. 이러한 생활 방식은 대만어 영화의 탄생을 촉진했다. 가자희 극단에서 고생하던 배우들에게는 기존의 이야기, 의상, 대사가 준비되어 있었으나 카메라만 없었으니 극단과 영화가 한 끗 차이 로 보였다.
첫 번째로 성과를 거둔 사람은 소나휘(邵羅輝) 감독이었다. 그는 ‘도마극단(都馬劇團)’과 함께 16mm필름으로 가자희 영화인 <육재자서상기 六才子西廂記>를 촬영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방영 기 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막을 내리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대만 중부의 유명한 가자희 극단 ‘공악사(拱樂社)’의 사장인 진증삼(陳 澄三)은 새로운 미디어인 영화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연속극을 촬 영한 경험이 있던 하기명(何基明) 감독과 함께 35mm필름으로 가 자희 영화 <설평귀여왕보천 薛平貴與王寶釧>을 제작했다. 이 영화는 1956년 상영돼 흥행에 성공했고, 영화 자체 제작에 대한 간 절한 마음에 불씨를 지피며 대만어 영화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백화제방! 영화 자체 제작의 실천
<설평귀여왕보천>은 35mm 흑백필름으로 촬영되었고 제작 비 용이 당시 몇십만 원밖에 되지 않았는데 수입은 기대 이상이었다. 이러한 성적은 여러 산업계의 자금을 끌어들였다. 당시에는 가자 희에 상업신극(商業新劇, 무대극) 극단도 존재했는데, 이 신극 극 단은 가자희와 마찬가지로 무대 공연을 스토리 보드로 만들어 장 면별로 촬영하고 극단의 이름과 스타를 내세워 관객을 유치했다. 이로써 가자희와 신극의 구성원들은 초창기 대만어 영화의 최고 생산량을 기록했다. 그해 흥행에 성공한 신극의 내용은 대부분 남 녀나 부모 자식 간의 슬픔과 기쁨을 서술하는 가정, 애정, 윤리를 소재로 삼았다. 이런 소재는 할리우드 멜로드라마와 비슷해 대만 의 25년 영화 시대 동안 가장 중요한 버팀목이 되었다.
대만어 영화의 탄생 초창기에는 영화계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을 시도한 여러 종류의 작품을 제작해 시장의 반응을 탐색했다. 하 지만 몇 년간 재조정을 거친 후 영화 산업의 경영 패턴이 형성되 었고, 도전에 성공한 사람들은 영화계에 계속 남았지만 실패한 사람들은 영화계에서 물러났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독자들에게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영화인이 있다. 바로 임단추(林?秋) 선생 이다. 그는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떠안고 영화를 통해 대 만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영화를 산업의 본보기로 삼아 이상적인 영화 국가를 만들고 싶어 했다.
임단추 선생은 타오위안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탄광 사업가의 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일본 유학 시절 희극과 영화를 접했고, 도 호시네마(東寶)에서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 대만으로 돌아온 후 에는 지식인들과 함께 극단을 구성해 작품을 통해 사회의 백태만 상을 그려내고 서민을 대변했다. 대만어 영화 시대를 맞이한 후 그는 일부 지식인 선배들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지식인의 이상 과 사업가의 투자를 결합해 1957년 옥봉(玉峯)영화사를 창립했 다. 그 산하에 본인의 영화제작소를 설립해 호산(湖山) 영화제작 소라고 명명했다.
임단추 선생이 영화제작소를 창립한 배경에는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날 선생의 한국인 친구가 대만을 방문해 만나게 되 었다. 두 사람은 일본 유학 시절 도호시네마에서 같이 일하던 사이 였다. 한국 친구는 대만에도 자체 제작한 영화가 있다는 사실을 들 었고, 임단추 선생은 자신도 지금까지 대만어 영화를 보지 못한 것이 생각나 그 친구를 데리고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가 끝난 후 한국 친구는 실망감을 나타냈고, 임단추 선생도 당시 대만어 영 화의 수준에 부끄러워했다. 이후 그가 호산 영화제작소에 심혈을 쏟은 것도 아마 이 일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다시 호산 영화제작소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임단추 선생은 이상 적인 영화제작소를 만들기 위해 대규모 공사를 시작했다. 그는 일본 도호시네마를 모델로 삼아 완전히 새로운 시설을 들여와 교 실과 기숙사를 만들고 직접 배우를 모집했다. 합격한 학생들은 학비를 내지 않고 모두 영화제작소에 거주하며 집중 관리를 받으 면서 식비, 기숙사비, 수업료 전액 무료에 용돈까지 받았다. 또 회 사는 학생들과 계약을 맺지 않아서 학생들이 만약 외부에 좋은 기 회가 있다면 자율적으로 외부에서 발전하도록 허락했다. 현재 남 아 있는 옥봉 영화제작사에는 임단추 선생이 학생들에게 돌아가 며 주연을 맡도록 해 제작한 작품이 있는데, 이는 모든 학생에게 실제 연습할 기회를 부여하는 교육 전략이었다. 임단추 선생의 이념은 교육한 인재는 회사만의 인재가 아니라 대만 전체 영화계 에서 활용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념은 얼마 지나 지 않아 현실에 직면했다. 옥봉 영화제작소는 심혈을 기울여 꼼 꼼하게 제작하고자 했으나 이는 기존 대만어 영화의 특징이며 주 류 방식이던 소자본으로 빠른 시간에 제작하는 방식을 끝내 바꾸 지 못했고, 영화 3편 출품을 끝으로 잠시 해산했다가 1960년대 중반 영화 2편을 더 만들어냈을 뿐이다. 현재 그의 영화 5편 중 3 편의 영화와 1편의 잔본만 복원되어 모두 TFI에 보관되어 있다. 임단추 선생의 작품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참신해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획기적인 미학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만약 기회가 된다 면 한국인들을 초청해 임단추 감독이 만들어낸 시적 정취 가득한 대만어 영화를 함께 감상하고 싶다.
글로벌 적응력 갖춘 대만어 영화의 다양한 모습
비록 초(超)이상적인 영화는 끝내 산업의 주류가 되지 못했지만, 대만어 영화 시대의 모든 작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명력으로 가득하다. 대만어 영화는 짧지만 힘 있는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10일을 상영 주기로 하고 제작기간이 10~20일로 매우 짧다. 제 작 비용이 저렴해 현재 대만 화폐로 약 200만 원이면 영화 1편을 신속히 제작해낼 수 있었다. 따라서 유연성이 높고 소재에 대한 적응력이 강하기 때문에 제작된 작품들은 조잡함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급변하는 산업 환경 속에서 대만어 영화가 대만 현 지 시장의 기호에 맞게 표현해낸 독창성을 발견할 수 있다.
현재 대만에서 가장 유명한 대만어 영화는 <대협 꽃사슴 大俠梅 花鹿>이다. 1961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의외로 젊은이들 사이에서 열렬한 토론 분위기를 불러일으킨다. 영화는 타이베이 근교의 산을 실제 배경으로 했고 배우들은 몸에 딱 붙는 동물 의상을 입었다. 90분 동안 대만의 대표적인 동물인 꽃사슴의 사랑과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내용을 줄거리로 삼고, 토끼와 거북, 양치기 소년 등 이솝 우화를 삽입해 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아동 영화로 설정했다. 하지만 영화에는 노출이 심한 옷차림으로 기타 수컷 동물을 유혹하기 좋아하는 여우, 큰 뿔 사슴이 암사슴을 강간하는 장면이 나오며 심지어 영화가 끝날 때쯤 주인공인 꽃사슴이 아버지를 죽인 원수인 흡혈 늑대를 붙잡아 아버지 무덤 앞에서 처형하는 장면도 나온다. 이러한 줄거리는 오늘날 보기에도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특징과 노출 이 과하다는(camp) 점을 느끼게 한다.
<대협 꽃사슴>은 대만어 영화의 소재가 다양함을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다. 대만어 영화는 앞에서 언급한 여러 민간 이야기를 소재로 삼을 뿐 아니라, 이야기의 소진이 매우 빨라 끊임없이 주변 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소재를 총동원했다. 국내외 소설, 드라마, 뉴스, 라디오 드라마, 유행가 편집도 포함되며, 심지어 당시 세계 적으로 유행하던 ‘007’ 시리즈, ‘타잔’ 시리즈, 서부 카우보이물 과 같은 영화를 모방한 작품들도 대만어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 다. 흥미로운 점은 그들의 이야기가 원작에서 벗어나 대만 현지에 밀접하게 개편되었다는 것이다.
대만어 영화의 새 보금자리, 대만영상자료원
현재 TFI는 약 200편의 대만어 영화를 소장하고 있다. 당시 생산 량에 비해 지금 보존된 것은 1/5도 채 되지 않는다. 영화는 1990 년대부터 대만의 덥고 습한 기후에 대응해 적절한 환경 조절이 가능한 창고에 잘 보관되어 있다. 2013년부터 TFI는 국내외 최고 복원팀과 협력해 20여 편의 대만어 고전영화를 복원했다. 그중 대 만어 영화 6편에는 앞에서 언급한 임단추 감독의 <남편의 비밀 丈 夫的秘密>(1960)과 <대협 꽃사슴>이 포함되어 있으며, 영문 자 막도 갖춰져 있다. 2017년에는 자체적으로 복원 실험실을 여러 곳 준공했으며, 향후 대만어 영화 시대 주요 감독의 대표작과 분야별 주요 대표작도 자체 복원할 계획이다. 또 서적 출판 계획도 세웠는데 대만어 영화 이야기를 통해 1960~70년대 대만 문화를 그려낼 생각이다. 우리는 그간 축적해온 복원 성과와 출판 작품을 더 많은 해외 관객과 연구자에게 보여주어 그들이 영화를 통해 대만 현지 문화와 더욱 친밀해지기를 희망한다.
by.
진예잉(대만영상자료원 전문 보조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