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메뉴 바로가기
하단 바로가기
로고
통합검색
검색
상세검색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서비스
ENG
업데이트
검색
DB
영화글
VOD
컬렉션
업데이트
영화글
기관지
DB
DB 서브
상세검색
작품 DB
인명 DB
소장자료
리스트
영화제
영화글
영화글 서브
연재
한국영화의 퀴어한 허구들
비평, 안녕하십니까
그때의 내가 만났던
명탐정 KOFA: 컬렉션을 파헤치다
사사로운영화리스트
세계영화사의 순간들
임권택X102
기획
칼럼
한국영화 NOW : 영화 공간 아카이빙 프로젝트
종료연재
기관지
VOD
VOD 서브
VOD 이용안내
가이드
VOD 기획전
전체보기
영화
영화인다큐
컬렉션
고객서비스
고객서비스 서브
KMDB 이용안내
온라인 민원
1:1문의
영화인등록
FAQ
오픈API안내
이용안내
파일데이터
Open API
공지사항
로그인
마이페이지
GNB닫기
DB
영화글
VOD
컬렉션
고객서비스
기관지
연재
기획
종료연재
기관지
이전
1485
필자의 글 입니다.
전체게시물(
1
)
빛나는 여자들을 보며 하하하 웃기
홍상수의 영화를 좋아한다는 사람, 특히 남자에 대해서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 ‘홍상수 영화’라는 한마디로 설명되는 정서의 독특한 구질구질함에 공감한다는 것은 내면에 똑같은 정서를 갖고 있다는 뜻이니까. 자신에게 없는 것에 공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누구나 마음속 한 평쯤은 그 구질구질함에 자리를 내주고 있나 보다. 공감하지 않기가 더 어렵다. 짜증을 내건 폭소를 터뜨리건, 영화를 보는 이들은 자신이 홍상수의 세계에 접속되어 있음을 느낀다. 그 공감의 접점은 흡입력이 대단하다.
홍상수의 첫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을 보고 와서 흥분하던 문학평론가 선생님을 기억한다. 1996년, 아직 청년이던 그는 그 영화가 “내 뒤를 따라다니며 일거수일투족을 찍은 것 같다”고 말한 뒤 “물론 내가 그렇게 산다는 건 아니”라고 덧붙였다. 삶은 다르지만 나의 하루를 찍은 것 같다는 말은 모순된 것처럼 보이지만 모순되지 않았다. 어떤 행동을 하는지와 상관없이 공유하고 있는 정서란 것은 그런 것이니까. 내가 하지 않은 짓조차 내가 한 것처럼 느끼게 한다는 것은 설득당했다는 얘기다. 좋아하느냐 좋아하지 않느냐와 상관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힘이다.
그것은 전혀 계산하지 않은 곳에서 발휘된다. 홍상수의 <하하하>(2010)를 보러 간 날, 나는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소득을 얻었다. 남자들이 온몸으로 구질구질함을 재현하는 한가운데에서 여자들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특히 왕성옥(문소리)은 마치 얌체볼 같았다. 누구의 손아귀에든 잡히지 않고 빠져나가 제멋대로 튀었는데, 덕분에 영화는 한층 예측불허, 생기를 띠었다. 왕성옥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도 모르게 웃었다. 질척대지 않고, 기죽지 않고, 어느 틈엔가 다른 곳에 가 있는 목소리.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남자들에게 여자가 어떻게 보이는지 마치 남자의 몸에 들어가서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강아지나 고양이의 시선으로 보면 사람의 집이 어떻게 보일까, 궁금해하며 달아놓은 카메라처럼, 영화는 철저하게 남자의 시선으로 여자를 보고 있었다. 노정화(김규리)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을 보라. 카메라는 남자들이 여자를 보는 방식 그대로 노정화의 몸을 훑어나간다. 쪽 빠진 하얀 종아리에서 시작하는 시선은 위로 올라가 김규리의 ‘예쁨’에 머문다. 아름답고 알 수 없는 여인. 내레이션 없이도 그 느낌을 충분히 알겠다.
여자를 그저 신비롭고 알 수 없는 존재로 못 박아두려는 것이 올바른 태도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하하하>는 기울어져 있다. 그 기울어짐은 수많은 남성작가가 쓴 한국소설과 닮았다. 그렇지만 영화 속 여자들은 액자 안에 들어가 있지 않다. 주머니 속 송곳처럼 제멋대로 삐져 나온다. 어쩌겠는가. 김규리와 문소리, 예지원, 윤여정 같은 여자들에게 액자 안에 갇혀 있으라고 할 수 있을까?
여자들은 알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남자들의 저 끝간 데 없는 구질구질함을. 그래서 애인이 아닌 다른 남자에게 눈웃음을 칠 때도 당당하고, 애인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운 것을 알았을 때도 시원시원하다. 마치 날씨에 반응하는 것처럼. 오늘은 비 온다는데 우산을 갖고 나갈까, 운동화 젖는 것 싫은데 슬리퍼를 신고 나갈까, 하듯이 남자들 사이를 오간다. 질척대는 남자들 때문에 애먹을 것도 없고, 끊어냈던 남자에게 다시 전화할 때도 망설이지 않는다.
여자들이 저렇게 눈부신 존재였던가? 어찌 보면, 이 또한 남자들이 보는 여자의 모습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여자들이 영화를 입체적으로 완성했다. 영화 자체가 좋은 영화인지와는 무관하게. 내가 다음에 홍상수의 영화를 본다면, 여자들 때문일 것이다. 철저히 남자의 눈으로 보았을 때 스파크를 일으키는 그 에너지 때문일 것이다.
영화가 끝난 뒤 진행된 감독과의 대화는 마치 또 하나의 홍상수 영화 같았다. 한 여성 관객은 홍상수가 통영을 멋지게 담아냈음을 칭찬하며 통영을 빛낸 시인들의 이름을 언급하다 급기야 노래도 한 곡조 뽑았다. 영화 속 캐릭터들이 납작하게 눌려 있지 않듯이, 영화 밖의 관객들도 제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즐겁게 반응했다. 나도 나쁘지 않았다. <존 말코비치 되기 Being John Malkovich>(스파이크 존즈, 1999)처럼, 남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경험.
by.
박사(북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