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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파]정의라는 이름의 판타지를 찾아서
정치는 ‘쇼’다. 대선을 코앞에 둔 지금, 정치가 명백히 쇼 비즈니스 영역 안에 들어왔다는 것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따로 없는 자명한 진리다. 우리는 요즘 관심의 촉수를 모두 정치 사회적 이슈에 곤두세우고 술자리의 안주처럼 불러내곤 한다. 어쩌면 이것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요즘 한국영화계가 머리 아픈 영화로 치부되던 사회파 영화를 부지런히 불러내고 있는 이유 말이다.
말 잘하는 세 남자가 가만히 둘러앉아 정치에 대해 다양한 ‘썰’을 푸는 <썰전>(JTBC)의 시청률이 종편으로서는 드물게 5%에 육박하고, 시사 고발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SBS)가 10%에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하는 것은 정치 사회적 이슈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그만큼 크고 넓다는 것을 방증한다. 극단적인 재미를 추구하는 국민 오락 프로그램 <무한도전>(MBC)조차 요즘엔 정치적 이슈를 소재로 삼아 웃기고 싶어 한다. 쉬는 시간 정치 팟캐스트를 챙겨 듣는 것이 심야 오락 프로그램을 챙겨 보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고, 하버드 교수의 강의를 묶어 낸 인문학 서적 「정의란 무엇인가」가 10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한국에 때아닌 인문학 열풍을 몰고 온 특이한 전례도 겪었다(이 책은 미국에서 약 15만 부의 판매고만을 기록했다). 이런 일련의 이상 과열 현상을 거치면서 우리는 정치 사회적 이슈에 훨씬 민감하게 대응할 수 있는 심리적 자아를 갖게 되었다. 사회적 이슈에 민감하고, 정의에 대한 관심이 충만한 우리에게 사회파 영화는 이제 그 자체로 최고의 오락 상품이다.
“솔직히 정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대통령의 허망한 고백 앞에서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우리 가족들이 모두 죽는 거”라고 외치는 <판도라> 속 재혁의 한마디는 세월호 참사 이후, 가슴속에 억눌려 있던 국민적 응분을 폭발시키며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전해준다.
시사 뉴스를 상업적으로 소비하는 시대
이처럼 정치 사회적 이슈가 가장 흥미로운 뉴스로 소비되는 요즘, 정의가 무엇인지 애타게 답을 찾는 사람들에게 최근의 사회파 영화는 훨씬 친숙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건넨다. 무거운 메시지 대신 정의의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내는 데 집중한다. 그간 사회파 영화라고 하면 만듦새는 조금 투박하지만 진심의 한 끝을 붙잡고 있기에 가치를 획득하는 영화들을 주로 떠올려왔다. 이런 영화에 한해 우리는 상장을 수여하듯 ‘사회파’라는 명찰을 달아주었다. 하지만 최근 극장가를 휩쓸고 있는 사회파 영화들은 때깔부터 확연히 다르다. ‘사회파’라는 이름에 붙어 있던 무거운 껍질이 완전히 벗겨졌다. 사회적 이슈를 다루되 단지 현실 고발에만 그치지 않고 재난 블록버스터나 액션, 코미디, 정치 드라마 등으로 자유롭게 돌진해나간다.
그래서 타락한 재벌과 치열하게 이를 쫓는 형사의 이야기를 그린 <베테랑>(류승완, 2014)이나 괴물 검사의 이야기를 그린 <더 킹>(한재림, 2016), 원전 사고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소시민들의 몸부림을 담은 <판도라>(박정우, 2015) 같은 영화들은 섣불리 ‘사회파’라는 이름 안에 가두는 것이 조금 어색하고 불편하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보통사람>(김봉한, 2017)이나 이 사건이 촉발한 1987년 민주화항쟁의 움직임을 좀 더 직접적으로 파고드는 <1987>(장준환, 2017), 일본으로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의 실화를 모티프로 한 <군함도>(류승완, 2017)에 이르기까지, 최근 개봉 중이거나 곧 개봉을 앞두고 있는 사회파 영화들은 이전의 사회파 영화들이 절대 보여주지 않은 스타일의 변화를 과감하게 시도하고 있다.
사회적 질문의 시작
변화의 조짐은 2000년대 초반에 시작됐다.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2003)가 1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역대 한국영화 흥행 1위 자리를 단번에 갈아치웠고, 신군부 시대 유린당한 인권 문제를 수면으로 한껏 끌어올렸다. 사회파 영화가 신파 정서와 만나 폭발적인 상업성을 과시하고, 사회적 관심까지 끌어낸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후 광주민주화운동을 직접적으로 다룬 <화려한 휴가>(김지훈, 2007), 실제 이태원에서 벌어진 미제 살인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 <이태원 살인사건>(홍기선, 2009), 10·6 사태의 뒷이야기를 그린 <그때 그 사람들>(임상수, 2005) 등 그간 금기시됐던 사회 정치적 소재들이 상업영화의 장르적 문법 안에 무더기로 편입되기 시작했다. 민감한 정치적 이슈뿐 아니라 동성애나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 등 다양한 사회적 이슈를 건드리는 영화도 속속 등장했다.
무기력한 지식인, 답답한 현실이라는 사회파 영화의 전형적인 공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사회문제를 새로운 영화 스타일로 담아내는 사회파 영화가 대폭 늘었다. 장선우와 박광수 감독 등 1980년대를 대표하는 사회파 감독들이 다져놓은 사회파 영화의 명맥에 새로운 불꽃이 점화됐다. 장선우, 박광수, 박철수 감독과 동시대 사회파 영화의 한 축을 담당했던 정지영 감독은 2010년 이후에도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사회적 목소리를 높였다. 사법부의 판결에 앙심을 품은 한 대학교수의 석궁 테러 사건을 그린 <부러진 화살>(2011)은 최근 사회파 영화의 본격적인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고, 고(故) 김근태 의원이 대공분실에서 겪었던 실제 고문 사건을 영화적으로 각색한 <남영동 1985>(2012), 지금도 조작 의혹을 받고 있는 천안함 사건의 진실을 다층적으로 파헤친 <천안함 프로젝트>(백승우, 2013)는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사건의 본질을 알리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읽혔다. 광주 인화학교에서 벌어진 아동 성폭력 사건을 다룬 <도가니>(황동혁, 2011)는 그 무렵 큰 국민적 공분을 자아내며 현실에서 ‘도가니 법’까지 통과시키는 영화적 힘을 보여줬다. 김태윤 감독이 연출한 삼성 백혈병 피해자의 가슴 아픈 사연을 그린 <또 하나의 약속>(2013), 죄 없이 10년간 감옥에서 보낸 청년이 뒤늦게 누명을 벗기 위해 애쓰는 이야기를 그린 <재심>(2016)은 본격 사회파 영화의 명맥을 오롯이 이어가면서 묻혀 있던 사건의 진실을 우리 사회에 널리 알렸다.
사회적 시스템, 그것이 알고 싶다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사회 내부의 시스템을 속속들이 알고 싶은 욕망. 요즘 사회파 영화들은 바로 그 지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재벌이 정치권력자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베테랑>), 정치계와 언론, 사법부는 또 어떻게 부당한 거래를 하고 있는지(<내부자들> <더 킹> <검사외전>), 다단계사업의 이면은 무엇인지(<마스터>), 최근 등장한 사회파 영화들은 대부분 이런 사회 내부의 긴밀한 이야기를 속속들이 파헤치는 데 열중한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회 내부의 본질을 다큐멘터리에 가깝게 심층적으로 파고드는 건 최근 사회파 영화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특징 중 하나다. 사회적 이슈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진 지금, 이제는 일부 특정 감독이 사회파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사회적인 이슈를 건드리고 파헤치는 데 익숙하다. 사회파 영화는 있되, 사회파 감독은 따로 없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요즘 사회파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은 자의식이 과도하게 들어간 리얼리즘 영화가 아니라 훨씬 장르적 규칙에 충실하게 사회적 이슈를 포장한다. 영화로 사회를 변화시키겠다는 야심 찬 목표 따윈 애초에 품고 있지 않은 듯하다. 보여주고 느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가벼운 심정으로 즐겁게 사회파 영화를 만들고 있다.
사회파 영화의 상품적 가치
질문은 여기서 다시 시작된다. 그렇다면 왜 지금 다시 사회파 영화일까. 최근 2, 3년 새 사회파 영화가 부쩍 많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정치 사회적 이슈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그만큼 높아진 것도 있지만, 최근 만들어진 사회파 영화들이 전례 없이 큰 상업적 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부당한 현실을 이기고 정의가 실현되는 결말은 현실에서 쉽게 이뤄질 수 없는 것이기에 더 특별한 판타지를 자극한다. 이런 영화들은 극적인 쾌감과 더불어 사회적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낸다. 일본 사회파 미스터리 소설의 추리적 기법이나 신파 코드가 다채롭게 동원된 최근의 사회파 영화들은, 확실히 이전보다 훨씬 큰 상업적 체력을 키워나가고 있다. 돈 되는 소재를 찾아 부리나케 달려가는 한국영화계가 숨은 과거를 이 잡듯이 뒤져가며 사회적 공분을 자아낼 만한 소재, 정의의 카타르시스를 끌어낼 만한 소재를 찾아 헤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연평해전>(김학순, 2015)이 평단의 혹독한 비판에도 6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고, 시대착오적 신파물 같았던 <인천상륙작전>(이재한, 2016)마저 7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예상 밖의 큰 흥행을 거뒀다. 이보다 훨씬 진지한 방식으로 사회적 이슈를 파고든 영화 역시 흥행에서는 절대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청년 시절 이야기를 다룬 <변호인>(양우석, 2013), 부패한 재벌과 이에 맞서 싸우는 형사의 이야기를 그린 <베테랑>이 모두 1천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한 것은 이 시대 사회파 영화가 가진 상품적 가치가 얼마나 크고 강렬한지를 여실히 증명해준다. 1987년 민주화항쟁 이야기를 다룬 <1987>, 광주 이야기를 다시 불러낸 <택시운전사>(장훈, 2016) 등 최근 정치 사회적 이슈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앞다투어 기획되는 이유다.
온 국민이 정치 사회적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금, 사회적 이슈를 다룬 영화는 현재 가장 상업적인 장르로 자리 잡으며 부지런히 관객과 교감하고 있다. 현실의 드라마틱함이 매번 영화를 능가하는 이 이상한 현실 속에서, 한국영화계는 앞으로 더 숨 가쁘게 사회적 이슈를 풍자하고 담아내는 작업에 열중할 것이다. 다행히 영화가 좋아할 만한 정치 사회적 이슈는 지금도 부지런히 생산 라인을 가동하고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국 사회파 영화가 당분간 소재 고갈에 허덕일 일은 절대 없을 듯하다.
by.
황희연(영화칼럼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