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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영화를 만난, 따뜻하고 푸른 극장
어린 시절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는 기억은 아버지를 한참 조른 후 읍내에 있는 ‘푸른극장’에 간 것이었다. 아버지는 7살 어린 여동생과 같이 간다는 조건으로 <라이온킹> 영화표를 끊어주셨다. 당시 유치원도 들어가기 전이던 동생은 영어로 말하는 ‘심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변 사람이 눈치를 줄 정도로 크게 울어대는 통에 동생을 달래고 어르느라 영화 관람은 진땀으로 얼룩져버렸다. 이 추억은 지금도 종종 동생에게 ‘내가 너를 돌보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느냐’의 용도로 풀어놓는데, 동생이 애니메이션 연출을 하게 되면서 하나의 무용담이 되었다. ‘내가 너를 생애 처음으로 극장에 데려가 보여준 게 애니메이션이었고 너의 직업의 10%는 나의 영향이다’로 귀결되는.
20대의 동생에게 극장은 삶의 터전이지만 나에겐 연애를 진행시키거나 진행하는 은밀한 장소였다. 어두운 공간에 좋아하는 사람과 나란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달아올랐다. 불이 꺼져 있으니 감각은 오히려 살아났다. 영화를 보는 상대의 얼굴만 봐도 머리가 핑그르 돌았다. 의자는 행복이란 글자처럼 폭신했고 영화 내용과 상관없이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연애는 영화처럼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게다가 끝나지도 않고 비극이 반복되었다. 비참한 심정만큼 연인이 가는 영화관에 앉아 있는 것 혹은 연인이 등장하는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한동안 극장 알레르기 아니 연애 알레르기가 생기고 말았다. ‘외로워해야만 나인 것 같아요…’(이승환 ‘침묵의 기록’)를 비장하게 부르며 연애의 전당 같았던 영화관에 발길을 끊었다. 그렇게 1년여가 흘렀지만 극장을 가지 않아도 연애를 하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 문제는 없었다.
그러던 중 한 음원 사이트에서 ‘영화 음악’에 대한 글을 내게 청탁해왔다. 영화관을 다시 찾아야만 했다. 마감에 쫓기고 쫓기던 중 덩그러니 영화관을 혼자 찾았다. 무서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무서움 속에 풍덩 빠지는 ‘홍수요법’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 역시 영화관은 전혀 위험한 공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때 적절한 은신처가 되었다. 업무나 주변의 연락을 못 받아도 용서되는 평안의 공간.
최근 집 주변의 극장 시간이 안 맞아 멀리 영등포의 극장을 찾았다. 평일 저녁 시간이었지만 내 앞뒤로 연인들이 가득했다. 어색해하는 마음은 불이 꺼지자 이내 편해졌다. 어쨌든 영화는 둘이 오건 단체로 오건 혼자서 마주해야 하는 작업이니까. 그 때 본 영화가 <모아나>였다. 이 애니메이션은 섬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소녀의 모험을 담고 있다. 주인공은 위기가 닥칠 때마다 ‘나는 모투누이의 모아나다!’를 주문처럼 외우며 문제를 헤쳐나간다. 집에 돌아오는 길 어느새 영화 속에 나오는 ‘How far I’ll go’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서른여섯이 되었는데도 만화 주제가를 부르니까 힘이 솟았다. 생각해보면 친구가 별로 없던 산골 소녀는 경남 고성 읍내 유일한 극장이던 푸른극장에서도 들은, 디즈니 만화에 나오는 노래를 무척 좋아했다. 가사들이 품고 있는 따뜻함과 용기를 믿었고 거기에서 삶을 배웠다. <모아나>의 엔딩은 왕자와의 키스가 아니었다. 세월의 힘이 디즈니 만화의 엔딩을 바꾸듯 나의 해피 엔딩도 이제 바뀌었다.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얼마나 멀리 가게 될지…(One day I’ll know, how far I’ll go)’ (<모아나 >‘How far I’ll go’)
by.
김반야(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