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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개발의 눈물과 숭고
1935년 발표된 심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신상옥 감독의 영화 <상록수>(1961)는 문예영화의 정치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화는 농촌의 빈곤과 낙후성을 타파하기 위한 여주인공 채영신(최은희 분)의 희생과 헌신, 그리고 그 대가로 치르는 연인과의 이별과 죽음을 강렬한 정서적 강도로 재현한다. 그럼으로써 이 영화는 후진성 탈피를 열망했던 1960년대 한국 사회의 대중에게 낙후한 당대 현실을 환기시키고 개발의 절박한 필요성을 설득하는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그렇다면 그 효과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그와 관련해 눈에 띄는 것은 영화 <상록수>가 소설과 달리 모성적 숭고의 논리를 극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채영신이 죽은 후 그녀를 추념하면서 박동혁이 학교의 종을 울리는 데서 끝난다. 그럼으로써 소설에서는 중심에 있는 엘리트 남성 주체(박동혁)를 부차화하고 채영신의 희생정신의 애도에 기초해 새로운 시작의 의미를 재구성한다.
푸른 하늘을 향해 솟은 상록수를 배경으로 환히 웃는 채영신의 얼굴이 오버랩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소설의 끝부분에서 채영신은 충분한 애도를 받지 못한 채 서사에서 사라져버리지만, 영화에서 죽은 그녀는 오히려 죽음으로써 하늘에서 모든 것을 굽어보는 신적(神的) 시선을 부여받는다. 이 장면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죽은 후에도 하늘에서 아이들을 인자하게 굽어보고 포용하는 숭고한 모성의 이미지다. 그러한 모성적 희생과 헌신의 이미지는 개발이라는 과제를 더욱 강력한 정서적 동일화의 대상으로 만드는 숭고의 논리를 완성한다.
칸트에 따르면 숭고는 우리가 심려하는 것(재산, 건강, 생명)을 사소하게 여길 수 있는 힘을 우리 안에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숭고는 자기희생이라는 차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남녀 주인공들이 사랑과 행복 같은 개인적인 가치를 희생하고 ‘농촌 계몽’이라는 이념적 대의에 헌신하면서 정신적 고양을 경험하는 <상록수>의 기본 구도는 그러한 숭고 논리의 대중미학적 버전이다.
본래 숭고의 논리 속에서는, 희생하는 것이 크면 클수록 혹은 많으면 많을수록 희생을 요구하는 어떤 대의나 가치의 크기는 더욱 커지면서 결국 초월적인 것이 된다. 여주인공 채영신의 눈물겨운 자기희생과 헌신, 그럼으로써 고양되는 정신적 충일과 일체감의 정서를 통해 관철되는 숭고의 미학은, 물질적 열등감을 각종 ‘정신혁명’과 ‘정신개조’를 통해 상쇄시키려는 박정희 체제의 정신주의적 기획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이 영화가 이후 박정희 체제의 근대화 논리와 사후적으로 공모하고 나아가 ‘새마을운동’의 교본으로까지 활용될 수 있었던 미학적 근거도 바로 거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숭고의 논리에서 표출되는 이상주의는 낙후한 물질 조건 속에서 경제개발과 근대화를 위한 자기희생을 불가피한 도덕적 의무와 윤리 차원으로 정당화하고 고양시킨다. 그런 면에서 그것은 대중의 자발적인 동의를 창출하고 대중을 동원하는 데 효과적으로 작용한 저개발 근대화의 감성적 논리였다고 할 수 있다. 헐벗은 농촌의 랜드스케이프를 통해 (물질적 무능력의 상징으로서) 빈곤을 재발견하고 그 극복의 수단을 정신 혁명(무지의 타파)에서 찾으며 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상록수>의 정신적 고양의 논리는 숭고의 메커니즘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다.
신상옥의 영화 <상록수>는 대중예술과 정치의 공모(共謀) 양상과 그 효과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그 근저에는 영화 내부에서 작동하는 숭고의 미학적 논리와 그것이 대중에게 발휘되는 감성적 설득력이 핵심적인 요인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대의를 위한 희생을 숭고한 것으로 이상화하는 숭고의 미학은 감정 분출을 극대화하는 멜로드라마적 서사 관습과 결합하면서 대중적 호소력을 더욱 극대화했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의 강한 호소력이 근본적으로는 오랜 빈곤과 낙후된 생활 환경으로부터의 탈출을 갈구하는 당대 대중의 욕망을 정확하게 투사하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는 그러한 대중의 욕망을 위로부터의 강압적인 근대화를 추진했던 지배 체제의 정치적 논리와 은밀한 방식으로 접속시킨다는 점에서 대중예술의 정치적 기능과 그 작동 논리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by.
김영찬(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