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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기]영화감독 이명세가 말하는 안성기
지금까지 형(안성기)과 작업할 때 단 한 번도 시나리오를 들고 만난 적은 없다. 형과의 작업 순서는 일단 만나고, 아이디어를 이야기하고, 스케줄을 확인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당대 최고의 스타와 중간 과정 없이 일대일로 만나 다음 작품을 결정한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다. 당연히 모든 스타와의 만남은 소속사를 통해야 하고, 소속사가 잡아주는 일정에 따라서 미팅이 결정되는데 부지하세월이다. 작품을 할지 말지를 떠나 만남이 이뤄지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그때 최고의 스타인 형과 그런 식으로 작업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시간을 함께한 서로의 믿음 덕이라고만 생각했다. 지나고 보니 행운이었다.
<형사수첩>은 미궁에 빠진 살인사건을 파헤치는 집념 어린 한 형사의 이야기다. 이 아이디어를 들고 형을 만난 것은 1997년 초, 아직은 겨울의 스산함이 남아 있는 봄의 문턱 즈음 학동 사거리 언덕에 있는 당시 가장 커피값이 비싼 커피숍이었다. 언제나처럼 나는 아이디어를 이야기했고, 형은 흔쾌히 작품에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 형에게 내민 시나리오는 <형사수첩>이 아니라 <인정사정 볼것 없다>(1999)였다. 기다렸던 시나리오에 형은 반색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내가 형에게 제안한 역할은 형이 기다리던 형사가 아니라 그 반대편에 있는 범인이었기 때문이다. 아주 잠깐, 해에 구름이 들 듯 형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진 것을 알았다. 그러나 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단지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서 떠들었다. 형은 어렵게 고개를 끄덕이며 작품에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몰랐다. 그때 형이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를.
1998년 부산국제영화제 오프닝에 맞춰 <인정사정 볼것 없다>의 제작 발표회를 열기로 한 그날, 형이 나에게 말했다. 이번 작업을 같이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처음에는 내 귀를 의심했고 다음에는 형이 농담을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짐짓 농담처럼 눙치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웬만해서는 누구의 부탁을 거절한 적이 없는 형의 성격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날 오구리 고헤이 감독과의 미팅에서 형은 계속해서 술을 마셨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나는 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대신 부탁한 것은 제작 발표회에 참석해 후배들, 박중훈과 장동건에게 격려 한마디 해달라는 것이었다. 발표회 당일, 마이크를 잡은 형이 한 말은 후배들에 대한 격려가 아니었다. “후배들과 같이 작업할 수 있어 기쁘다”였다. 기대치 않은 말이었다. 그날 나는 양복을 입은 채 해운대 밤바다에 뛰어들었다. 대취(大醉).
그날 이후 지금까지 형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러나 차마 남세스러워 하지 못한 말을 이 자리를 빌려 하고 싶다. 아마 그 이유로 이번 원고 청탁을 흔쾌히 받아들였을 것이다.
“형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by.
이명세(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