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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럼 붉었던 여름
나는 군인 아버지를 따라 전학을 많이 다녔다. 국민학교 5학년 때는 전라도 광주로 갔다. 바야흐로 여름이었고, 나는 수영장을 다녀오면 꼭 귓병을 앓았고, 충장로의 한 이비인후과에서 진료를 받곤 했다. 처음에는 엄마와 같이 갔지만, 엄마는 일보러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잦았다. 나중에는 혼자 병원에서 내 차례를 기다리곤 했다. 치료라고 해봤자 약솜으로 귓속을 닦아내고, 레이저 좀 쐬던 게 다였을 것이다. 병원 맞은편은 극장이었다. 무더위로 녹아 내릴 듯한 여름날,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간판에는 검은 물체가 커다란 가위를 들고 있었다. 피처럼 흘러내리는 붉은 물감으로 쓴 ‘버-닝’이란 제목. 1980년대는 그랬다. <공포의 여대생 기숙사>나 <13일의 금요일> 등의 슬래셔 무비가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다. 저 커다란 가위로 사람 목을 뎅강 자르는 거겠지? 무서웠지만 호기심 또한 많았던 나는 그 조악해 보이는 간판에 이런저런 상상력을 덧붙이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러다 지루해지면 대기실 테이블 밑 차곡차곡 놓인 주간지를 꺼내 봤다. 「선데이 서울」 「사건과 실화」 같은 것들이었을 테고, 수영복 입은 여자 탤런트의 브로마이드가 껴 있곤 했다. 물론 난 영악한 계집애였으므로, 절대 그걸 펼쳐 보거나 하는 눈에 띄는 짓은 하지 않았다. 살인이니 치정이니 폭로니 기자회견이니 하는 제목들로 점철된 주간지를 읽다가도, 대기실에 간호사 언니나 어른이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지면 얼른 잡지를 제자리에 두고 다리를 대롱거리며 간판 그림에 시선을 주곤 했다.
그렇게 이비인후과와 수영장을 오가다 5학년 여름방학은 끝났다. 간판 그림 관람도 끝났다. 그 영화관의 이름은 광주극장이었다. 극장 안은커녕 매표소도 기웃거려보지 못한 극장. 1935년에 문을 열어 80년 넘게 쉼 없이 영화를 상영 중인, 4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 어른이 된 지금은 언제든 들어가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일단 광주라는 동네에 가본 지가 내겐 너무 오래인 것이다.
6학년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서울로 마지 막 전학을 갔다. 어머니의 교통사고와 고모 댁으로의 이사라는 변화된 환경 속에 나는 빠르게 광주를 잊었다. 그러나 지금도 가끔씩 누군가 가위를 들고 있는 간판이 걸린 극장 생각이 난다. “오빠들이 피 흘리며 누워 있었어”라던, 그 시절에는 결코 이해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비밀스레 속삭이던 친구들도.
by.
정지연(「스트리트H」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