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가 막으랴, 소년들의 극장행
대천해수욕장으로 유명한 충청남도 보령시. 내가 고등학생일 때(1987~89년) 보령(당시는 대천시)에는 딱 세 개의 극장이 있었다.
명보극장은 1,000명이 동시에 들어갈 수도 있을 만큼 컸다. 대천극장은 수용 정원이 100명 정도. 그리고 50명이 들어가면 숨도 못 쉴 만큼 답답했던 원동극장. 워낙 작은 고장이어서 그러하겠지만, 우리에겐 그 세 극장이 하나의 극장(동네 극장 1관, 2관, 3관)과도 같았다.
잘못된 기억일 수도 있겠지만, 극장의 크기와 영화의 애정 표현 수위가 반비례했다. 명보극장에서는 어린이로부터 노인까지 함께 보아도 어색하지 않은 영화를, 대천극장에서는 미성년자 딱지를 떼야만 입장이 가능한 영화를, 원동극장에서는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음란물에 가까운 영화를 주로 상영했다.
선생님들은 우리가 야간 자율 학습을 땡땡이치고 그 어떤 극장에 가는 것도 허하지 않았으나, 우리는 어떻게든 갔다. 명보극장에서 걸리면 꿀밤 정도로 그쳤고, 대천극장에서 걸리면 몇 대 맞는 것으로 끝났지만, 원동극장에서 걸리면 혹독한 사랑의 매와 얼차려를 각오해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전무후무한 교복 자율화 세대였다. 극장 출입하기에 상당히 유리한 조건이었다. 사실 선생님들도 아주 바빠서(민주화운동기였다! 안 바쁜 어른들이 없었다!) 우리의 극장행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명보극장과 대천극장에서는 인구 10만의 전 고장민이 다 보기 전에는 물러가지 않겠다는 듯한 영화가 며칠이고 계속되었다. 보름간 간판을 내리지 않은 영화도 꽤 있었다. 원동극장에서는 소위 동시상영으로 영화 두 편씩을 틀어주었는데 이틀이 멀다 하고 바뀌었다. 원동극장은 단체 비디오방이었던 것이다.
명보극장과 대천극장에서 하는 것은 무조건 보고, 원동극장에 틈틈이 드나들었다. 일주일에 예닐곱 편의 영화를 꼬박꼬박 보았다. 영화와 상관없이, 명보극장은 광장에라도 와 있는 듯 해방감을 주었고, 대천극장은 아늑한 맛이 있었고, 원동극장에서는 긴장감이 충만했다. 당시 우리는 극장 말고는 향유할 문화 공간도 일탈할 장소도 없었다. 우리는 영화를 보러 갔고, 극장 순례선 상에서 좌충우돌로 벌어지던 에피소드를 되새김질했다.
그 추억들을 하나하나 짚어볼 참인데, 이미 주어진 지면이 다해버렸다. 이런, 이런!
by.김종광(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