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의 노년에 갈채를
이 장면은 절대 스포일러가 될 수 없으니 이야기해도 괜찮다. 영화 <마지막 4중주 A Late Quartet>(야론 질버맨, 2012)의 끝 장면은 베토벤의 현악 사중주를 마지막으로 연주하는 사중주단의 모습이다. 리더는 퇴행성 질환인 파킨슨병이 발병했음을 최근 깨달았고, 이 연주를 마지막으로 은퇴할 예정이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물려받아 사중주단에 새로 합류하게 된 젊은 연주자를 소개하며 담담한 목소리로 소감을 이야기한다. 세월과 함께 나이가 든 오랜 팬들은 박수를 치고, 사중주단은 새로운 주자와 함께 베토벤을 마저 연주한다.
이 장면을 진화의 눈으로 보면 또 다른 감동적인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다. 인간만이 경험하는 생의 한 시기인 노년과,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인류애적 자세다.
주인공을 무대에서 영원히 ‘퇴장’시킨 파킨슨병은 아직 정확한 원인과 발병 기작을 모르는 질환이다. 퇴행성 질환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주로 노년에 생기며 어떤 뚜렷한 병인이 있다기보다는 나이 듦 자체가 발병을 높이는 질환이다. 하지만 이 병이 주인공의 은퇴를 결정한 것은 아니다. 병이 아니었더라도 주인공은 몇 년 지나지 않아 은퇴를 결정했을 것이다.
나이가 든 연주자의 기량이 젊을 때보다 못해지는 현상은 흔하다.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시게티가 예순을 넘긴 나이에 녹음한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듣다 보면, 확실히 날카롭고 정교한 맛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물론 그와 별개로 기예를 초월한 묵직한 해석의 맛이 아쉬움을 압도하지만.
나이가 들면 병에 걸릴 위험이 높아지고 신체를 통제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노화’라는 말로 이 현상을 간단히 재단하곤 한다. 하지만 노화는 그리 단순한 현상이 아니다. 그냥 나이를 먹는다는 뜻이 아니다. 신체적・지적 퇴행을 동반하는 일련의 현상이다. 문제는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고, 서로 간에 맥락도 별로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운동을 통제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기억력이 나빠진다. 피부의 탄력이 떨어지고, 매력적이고 밝았던 얼굴은 어둡고 칙칙하며 매력적이지 않은 비율로 변한다. 판단력도 흐려진다. 노화의 구체적 징후는 산발적이고, 현상적으로 서로 별로 연관되지 않으며, 이들 사이의 유일한 공통점은 ‘나이가 들어서 나타난다’는 것뿐이다. 노화의 대표적 현상의 원인이 노화라니, 순환 논법이다. 우리는 아직 노화에 대해 많이 모른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노화는 생명의 보편적인 개념이 아니다. 노화는 생명체 중에서도 특정 분류군에서만 발견되는 특이한 현상이다. 예를 들어 미생물은 늙는다는 개념이 없다. 이들은 영원히 자신과 똑같은 유전적 복제물을 남기며 산다. 불멸하는 셈이다. 동식물에만 노화가 있는데, 그나마 동물과 식물의 노화가 전혀 다르다.
식물의 노화는 사계절 등 외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사전에 계획된 프로그램에 따라 사는 것이다. 봄에 잎을 틔우고 자라 꽃을 피운 뒤 씨앗을 남기고 가을에 잎을 떨어뜨리고 겨울을 견딘다. 봄엔 다시 싹튼다. 순환하는 노화다. 오직 동물만이 우리가 아는 노화를 겪는다. 이들의 노화는 기계가 소모되는 것과 비슷하다. 인체의 노화도 여기에 속한다. 다만 인류는 한 가지 현상을 추가로 겪는다는 점이 다르다. 노년이다.
옛 인류의 화석을 연구한 인류학자들에 따르면,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는 노년을 겪은 첫 인류다. 그들이 겪은 노년은 다음 세대를 출산할 수 있는 나이 이후로, 대략 30세 이후였다. 오늘날에는 의학이라는 문화적 적응 기작까지 더해져, 노년의 범위는 퇴행성 질환이 나타나는 생애주기까지 확장됐다. <마지막 4중주>의 주인공처럼, 혹은 요제프 시게티처럼.
그 결과는 긍정적 요인과 부정적 요인을 모두 포함한다. 긴 생애주기는 기예를 갈고닦으며 이를 다음 세대에 전수할 충분한 시간을 인류에게 부여했다. <마지막 4중주>의 주인공이 25년이나 사중주단을 이끈 것도 제자를 가르친 것도, 보편화한 노년이 충분한 시간을 준 덕분이었다. 반면 퇴행성 질환이라는, 현생인류 이전의 어떤 생명체도 보편적으로는 겪지 않았을 증세로 퇴장하게 된 것도 노화 때문이었다.
오직 인류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이 독특한 현상에, 영화 속 청중은 격려와 존경의 박수를 보냈다. 인류는 거칠게 말해 ‘퇴물’이 된 이전 세대를 박수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기예와 지혜가 응축된 예술이 탄생하고 그것이 우아하게 전승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런 존중에 있었음을, 역시 하나의 예술인 영화가 보여주고 있다.
by.윤신영(과학동아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