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욕망을 넘어 자아의 글쓰기를 향하여
프랑스의 정신분석가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열일곱 번째 강연집인 「정신분석의 이면: 1969~1970」에서 어머니의 욕망이란 언제 입을 닫을지 모르는 거대한 악어와 같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정신 분석의 관건은 악어 입속에 갇힌 아이를 그 욕망의 덫에서 구해내는 것이다. 사실이 과제를 수행할 때 가장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야 하는 사람은 어머니다. 그녀가 수행해야 하는 임무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는 것이다.
정지우 감독의 <4등>(2016)은 아이를 향한 어머니의 욕망이 가진 문제점과 욕망의 폭력성을 극대화하는 대한민국의 교육 체계를 함께 비판하며, 온전한 나 자신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있다. 이것은 정신분석의 아버지인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평생 화두로 삼은 문제이기도 하다. 프로이트가 「여성동성애자의 심리적 기작」이라는 논문에서 제시하는 사례는 이 문제에 대해 정신분석이 제시하는 해답을 잘 요약해준다. 그는 이 논문에서 부모들이 자주 자신을 찾아와 아이가 신경증 증상을 보이고 말을 독하게 듣지 않는다고 호소하며 제발 아이를 다시 건강해지도록, 자신들의 규칙에 복종하고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되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한다는 이야기를 담았다. 그런데 이때 프로이트는 부모들이 말하는 ‘건강’이라는 게 사실은 정신분석에서 정의하는 치유 개념과는 매우 다른 것이라고 설명한다. 즉 규칙에 복종하는 상태란 개인의 개별성이 말살된 인간을 뜻하며, 그것은 결코 정신분석적 주체의 모습이 아니라는 뜻이다. 프로이트는 만약 자신이 정신분석으로 아이를 분석해 아이가 자신의 장단을 찾게 되면, 그는 자기 생각과 결단을 부모 앞에서 관철할 것이며, 이 때문에 이전보다 더욱 더 부모를 곤란하게 만들 것이라고 말한다.
정신분석 전공자로서 프로이트를 대중화하기 위한 노력으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 중 하나는 중・고등학교 강연이다. 강연 후 사인회에서 나는 항상 아이들에게 자신의 장단을 찾기 위해 가장 필요한 단어 하나를 말해달라고 요청하는데, 한번은 아이의 손을 잡고 어머니가 앞으로 나오셨다. 준호와 어머니가 코치를 만나는 영화 속 커피숍 장면처럼 나는 아이에게 질문했으나, 답은 어머니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아이에게서는 생각이 입술로 옮겨지는 징후인 입술의 찡긋거림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아이는 말하려고 하지 않았고 말할 엄두를 내지도 않았다. 나는 그때 SF적 광경을 목격했는데, 내 눈앞에 뇌 두 개가 보였다. 주름이 많이 잡힌 큰 뇌는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으나, 그 뇌에 몇 개의 신경으로 연결된 작은 뇌는 미동조차 없는 듯 보였다. 큰 뇌가 일하니 작은 뇌는 쉬어도 되는 것이다. 작은 뇌는 내 앞에서 잠시 머무는 그 짧은 순간 동안에도 조금씩 퇴화하고 있었다.
영화에 나오는 ‘수영하는 엄마들’이라는 표현은 작은 뇌를 대체하는 큰 뇌의 폭력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다. 영화는 수영하는 주체가 엄마에서 아이가 되어가는 과정, 즉 아이가 자신의 장단 속에서 온전한 주체가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비단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두 손을 모았을 때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빌 것이 없는 어머니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정신분석에서 1등이란 개별성을 찾은 사람들을 지칭하는 순위라 볼 수 있다. 라캉은 스물세 번째 강연집에서 온전한 나 자신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된 사람의 사례로 제임스 조이스를 제시하며, 이 과정을 ‘자아의 글쓰기’라 불렀다. 준호가 수영장에서 빛으로 물결을 만드는 모습은 진정 자아의 글쓰기를 압축하는 이미지라 할 수 있다. 내 삶의 글쓰기가 시작되는 곳은 가정이다. 아이의 부모가 아이 스스로 장단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부모라면 그들 역시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사람들, 즉 자아의 글쓰기가 가능한 사람들일 확률이 높다. 그 가정의 구성원들은 욕망의 폭력으로부터 보호된다. 가족 모두가 행복한 삶을 만드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시작은 내 아이가 악어의 입 밖으로 걸어나가도록 응원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나만의 개별적 글쓰기를 통해 내 삶을 가꾸는 어른에게만 허락된 능력이다.
by.김서영(정신분석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