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나의 디카프리오
내가 아는 세련된 지식들은 대개 세 살 위의 언니에게서 전해진 것들이었다. 중학생이던 나에게 고등학생 언니는 뭘 해도 그럴듯해 보이는 동경의 존재였다. 그 언니가 돌아오는 일요일에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러 서울극장에 간다는 말을 뱉은 순간, 내 삶의 목적은 오로지 그 영화관에 따라가는 것이 되었다.
다행히 언니는 성격은 나쁘나 잔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인격 모독적인 언사가 조금 오가긴 해도 결국 “그럼 빨리 준비하고 쫓아와”라고 말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는 기나긴 이름 또한 언니의 입에서 처음 들었다. 먼 타국에서 소문처럼 전해진 그 이름은 소녀의 마음을 마구 헤집을 만큼 충분히 신비로웠다.
극장은 판타지를 대면하는 창구이자, 그 자체가 판타지이기도 했다. 동경하는 언니들의 공간이었기에 어떻게든 끼고 싶었던 어른스러움의 상징이기도 했다. 이토록 멋진 극장에 무려 고등학생 언니들과 어울려 오게 되니 어찌나 설레던지, 조조영화가 시작되기 두어 시간 전부터 서둘러 집을 나섰다. 인터넷 예매라는 것이 없었으니 행여 매진이 되면 어쩌나 싶은 걱정도 한몫했다. 하지만 우리가 도착했을 때 이미 극장 앞에는 근처의 종로3가 지하철역까지 닿을 듯한 긴 줄이 이어져 있었다.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꽤나 정성을 기울여야 하던 시절이었다.
2층으로 된 극장의 좌석 대부분은 여성 관객이 차지하고 있었고 모두의 마음은 명백했다. 우리는 이미 로미오를 사랑하고 있었다. 동시에 줄리엣을 미워하고 있었다. 클레어 데인즈의 울부짖는 얼굴이 클로즈업 될 때, 누군가 “못생겼어”라는 말을 큰 소리로 내뱉었다. 그러자 주변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디카프리오로 대동단결된 극장 안에는 묘한 유대감이 가득 차 있었다.
다음 날 언니와 나는 종이 상자에 영화 팸플릿을 잔뜩 오려 붙여 필통을 만들었다. 필통 위에 디카프리오가 가득했다. 그가 실제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름부터 희귀한 서양의 로미오였고 그랬기에 더욱 빠져들었다. 극장도, 디카프리오도, 자주 만날 수 없는 귀한 무엇이었기에 애틋했고, 애틋했기에 간절했다. 고작 극장에 가는 일만으로도, 제법 오래 행복할 수 있었던 소녀 시절이었다.
by.김희진(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