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간직한 ‘동네극장의 추억’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의 어느 여고에서 문학을 가르치다가 1990년대 반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 후 10년간 그곳에 머물며, 와세다 대학 문학부에서 영화이론으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EBS라디오 로그램 <세계음악기행>의 주말 DJ를 거쳐 작사가로 활동중이다.
운동화를 구겨 신고 집 앞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로 나가면, 길 건너에 커다란 극장 간판이 보인다. 횡단보도를 건너 매표소 앞에 도착하기까지 걸리는 총 시간이 약 5분. 거기서 5분이 더 지나면 난 이미 2층에 올라와 객석에 앉아 있다. 꼭 영화가 시작하는 시간에 맞춰 극장에 가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자리는 늘 비어 있을테고, 영화가 끝나면 처음부터 한 번 더보면 된다. 생각해보면 이런 극장이 동네마다 하나씩 있던 그 시절이 부럽다. 나는 분명 그 시절을 살았지만, 그때 난 너무 어려서, 내 마음대로 극장을 드나들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라는 제목에, 종교영화일 것이라고 확신한 어머니를 따라갔다가 도중에 나 혼자 쫓겨나온 일도 잊지 못할 그 시절의 추억이다. 극장 간판은, 이제는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 페인트 그림, 1층 매표소 옆에는 스틸사진 몇 장이 유리로 덮은 장식장 안에 걸려 있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동네안경집 선전이 나오고,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다들 눈치 보며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고, 아저씨들은 담배를 피우며 영화를 보던 시절이다. 나 혼자 극장을 들락거릴 나이가 됐을 때는 이미 재개봉관도 아닌 동시상영관으로 바뀌어 있던 그 극장 건물에는 대형 마트가 들어선 지 오래다.
시골 큰집 동네에도 그런 극장이 있어서, 나이 차이가 많은 사촌형, 누나들을 졸라 자주 영화를 보러 갔다. 필름이 타들어가는 모양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며 상영이 중단되는 일은 심심치 않게 벌어졌고, 손님이 너무 적으면 아예 영화를 틀지 않고, 다음에 오라면서 회수권 같은 표 한장을 쥐여주며 돌려보내던 그 극장은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극장은 지금도 많다. 시설은 좋아졌으며, 볼 수 있는 영화도 늘어났다. 앞사람의 머리가 스크린을 가리는 일도, 도중에 몇 번씩 필름이 끊기는 일도 없다. 하지만 이제는 사라진 그 시절의 극장이 그리운 것은 왜일까? 아마도 그건 그저, 지난 시절을 얘기하기 좋아할 만큼 내가 나이들었기 때문이겠지만, 객석 뒤편의 두툼한 문을 살짝 당겼을 때 새 나오던 그 빛과 소리, 그 기분을 여전히 잊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리를 찾아 앉을 생각도 잊은 채, 그 자리에 서서 홀린 듯 스크린을 바라보던 그 기억이 내게는 영화,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열 몇 편의 최신 영화 중 마음에 드는 영화를 골라, 스마트폰으로 시간표를 확인해 앉고 싶은 자리를 예약하고, 언제든 달려가서 볼 수 있는, 깨끗하고 깔끔한 요즘 극장에도 큰 불만은 없다. 하지만 타임머신이 있다면, 흘러간 옛 영화의 지글거리는 필름이 영사기에서 돌아가는 그 시절의 동네 극장으로 가고 싶다.
by.박창학(작사가, 음악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