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낄 것 없는 시도, 웃음을 참을 수 없는 정취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영화를 본 기억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대학 시절 <공포의 이중인간>(이용민, 1974)을 본 일이다. 나는 친구와 함께 공포영화로 음침하게 출발해서는 갈수록 엉터리로 변하는 그 영화를 신나게 웃으며 보았다.
그날 기억이 재미나서, 나는 종종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괴상한 한국고전영화를 찾아 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오늘 이야기할 영화는 <아라한>(김정용, 1986)이다. <아라한>은 당시 점점 사라져가고 있던 한국산 홍콩식 무술영화에 속한다. 배경은 만주나 중국 어디쯤으로, 중국 옷을 입은 사람들이 홍콩 무술영화 흉내를 내는데, 그렇지만 한국영화이기 때문에 사실은 그 인물들이 그냥 중국인이 아니라 굳이 거기서 핍박받으며 사는 한인이주자들이라는 식이다.
그런데 이 <아라한>에는 극히 상투적으로 짠 한국산 홍콩식 무술영화 줄거리에다, 누가 어느 단계에서 결정했는지, 엉뚱하게 <인디아나 존스>식 모험영화 소재가 억지로 끼여 있다. 아마도 그해 초에 개봉했던 성룡의 <용형호제>를 보고 누군가가 “어차피 성룡 흉내 내는 영화 만들고 있었는데, 우리도 저런 비슷한 장면까지 넣자”고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그 때문에 괜히 중국 무술을 하며 악당 곁에서 도망가던 주인공 옆에 문득 궤도차가 하나 나오더니 이유 없이 그걸 타고 다 같이 “하하하하하” 웃으며 붕붕 날아가는 장면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 모든 내용은 극히 혼란스럽게 막 섞여서 덕지덕지 편집된 채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중간에 여자 주인공이 죽는 장면이 처절하고 길게 나오는데 그러고 나서 그다음에 여자 주인공 없이 내용을 진행할 방법이 마땅히 없으니까 그냥 다 집어치우고 갑자기 여자 주인공이 어딘가에서 잠에서 확 깨어나는 장면을 눌러 넣고, “지금까지는 다 꿈이었다”고 치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버릴 정도다.
이런 영화인데도 순간순간 왜인지 진지하거나 한 맺힌 감정이 유난히 많이 나온다. 그러니 가면 갈수록 이 모든 것이 설마 패러디가 아닌가 싶게 엇나가기만 하는 느낌이 든다. 막판 즈음 악당 두목을 다시 만난 주인공이 어쩌자고 그러는지 극히 진지한 표정으로, “언제 봐도 지루한 얼굴!”이라는 대사를 외칠 때가 되면, 이게 웃자고 하는 건지 뭔지 아무도 모르지만 상영관 내의 모든 관객이 동시에 돌출적인 웃음을 짓게 되는 것이다.
<아라한>은 1980년대, 요동이 심했지만 그래 봤자 주저앉아 발버둥치는 것만 같던 당시 한국 오락 영화의 단면을 관찰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포스터에는 ‘미국에는 람보, 아시아에는 아라한’이라는 문구와 함께 도무지 뜻을 알 수 없는 ‘아이큐 200’이라는 말이 대뜸 적혀 있는데, 그처럼 서로 전혀 연결되지 않으면서도 계속 새로운 장면이 튀어나오는 영화였다. 세상을 살다 지쳐가는 어느 날, 낯선 사람들이 같이 모이게 되는 상영관에서, ‘그때는 뭘 만들겠다고 모여서 이러고 있던 사람들도 있었구나’ 생각하며 한번 다 같이 웃어보기에 좋은 영화일 것이다.
by.곽재식(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