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의 역사적 배경과 1930년대 경성: 경성, 이건 몰랐지?
최근 한국영화계에는 20세기 초 한국을 다룬 역사극 제작 붐이 일고 있다. 이전에는 주로 역사적 평가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고 사료가 풍부한 조선시대를 위주로 영화가 제작돼왔지만, 학계의 꾸준한 근현대사 연구와 이 시기에 대한 대중의 관심 증가가 영화의 소재와 배경으로 근현대사를 새롭게 조명하게 하는 듯하다.
천만 영화 <암살> 속의 인물과 배경
지난여름 개봉해 천만 관객에게 역사 속에 잊혀가고 있던 무장 독립운동가들을 소개하면서 짙은 감동을 안겨준 영화 <암살>은 실제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면면에서 모티프를 얻어 에피소드와 인물을 구성해냈다.
친일파를 암살하기 위해 만주에서 경성으로 오는 주인공 안옥윤(전지현)은 1930년대 무장 독립운동계에서 활동한 여러 여성 독립운동가의 생애와 활동상을 재구성해 만들어진 캐릭터다. 대표적으로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 여사가 경성에서 총독 암살을 꾀한 적이 있으며, 만주에는 남성 독립운동가들뿐만 아니라 나라를 되찾기 위해 여성의 삶을 넘어서 동분서주했던 많은 여성독립운동가가 존재했다.
주인공 안옥윤의 조력자인 속사포(조진웅)는 신흥무관학교 마지막 졸업생으로 소개되는데,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는 항일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서간도 지역에 설립된 독립군 양성 학교였다. 신흥무관학교의 교육 목표는 독립군을 이끌 고급 지휘관을 키우는 데 있었다. 이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까지 지속하면서 20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실제 이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김좌진의 청산리전투와 홍범도의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일익을 담당했고, 이후 우리나라 무장독립운동의 요소요소에서 큰 활약을 했다. 영화 속 캐릭터인 속사포가 신흥무관학교 졸업 때 썼다는 시 ‘낙엽이 지기 전에 무기를 준비해 압록강을 건너고 싶다’는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지낸 독립운동가 김경천의 일기에 나오는 구절이다.
헝가리인 마자르에게 불법 폭탄 제조술을 배웠다는 황덕삼의 이야기 또한 실제 독립운동가들이 헝가리인을 통해 폭탄 제조술을 배우고 무기를 사들인 일이 있었는데 이를 영화 속 캐릭터 구현에 이용한 것이다.
캐릭터뿐만 아니라 암살의 배경이 되는 경성의 모습도 1930년대 경성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는데, 암살단의 목표가 되는 극렬 친일파 강인국(이경영)의 집은 친일파였던 한상룡이 지은 ‘백인제 가옥’에서 촬영됐다.
한상룡은 영화 속 캐릭터인 강인국 이상으로 친일을 했던 인물로 일제강점기 조선 제일의 재계 인사를 운위하며 나라를 배신하고 동족을 팔아먹은 대가로 호위호식을 하던 인물이었다.
1913년 그는 북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 위 2460m2(약 744평)에 달하는 부지에 압록강에서 벌목해 온 흑송으로 전통 방식과 일본 양식을 접목한 집을 지었다. 영화에서처럼 한상룡이 기거할 당시 이 집은 친일 악행의 산실로 총독을 비롯한 일제의 고위관료를 초대해 연회를 열었고, 미국 재력가인 록펠러 2세도 이곳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했다고 한다.
이 집의 이름이 오늘날 ‘백인제 가옥’이 된 것은 백병원의 창립자인 백인제가 1944년 이 가옥을 사들인 후 2009년까지 백씨 집안에서 보전해왔기 때문이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르기도 한 백인제는 국내 최초로 신장 적출 수술에 성공하는 등 조선 제일의 외과 의사로 명성을 쌓았고 광복 후 백병원을 창립하고 후학 양성에 힘쓴 바가 크다. ‘백인제 가옥’은 최근 서울시가 역사가옥박물관으로 재정비해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1930년대 소비와 결핍의 도시 경성
한편, <암살>에서 안옥윤이 쌍둥이 언니를 재회하는 백화점은 현재도 남대문 인근에서 백화점으로 이용되는 건물의 모습을 따랐다. 이 건물은 1930년 일본의 미쓰코시백화점의 경성점으로 지어졌다. 현재는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경성은 청계천을 기준으로 북쪽에는 조선 사람들이 살았고 남쪽에는 일본인들이 신시가지를 형성했다. 1930년대 당시 청계천 이남 지역을 북촌에 대응해 남촌이라고 불렀다. 남촌은 일본이 정책적으로 개발한 지역이니만큼, 일본적인 것이나, 일본을 통해 들어온 새로운 문물이 포진해 있었다. 남촌은 본정통(지금의 충무로), 명치정(지금의 명동) 등 남산 기슭의 일본인 상가를 중심으로 형성됐다. 남촌 지역에는 미쓰코시나 조지야 같은 큰 일본 백화점이 생기고 근대적 건물들에, 근대적 물건들이 쇼윈도를 장식했다. 영화 속 안옥윤의 쌍둥이 언니가 옷을 맞추고 쇼핑을 하는 장소는 바로 이 남촌 지역이다.
영화에서 암살단 조력자인 아네모네의 마담(김해숙)은 겉으로는 카페를 운영하면서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한다. 이 아네모네 마담이란 이름은 1932년 발표된 주요섭의 단편소설 「아네모네 마담」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는데, 1930년대 당시 카페는 근대적 휴식 장소로 새롭게 유행하기 시작했다. 남촌에 있던 남산 기슭을 중심으로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속에서 양장을 입은 ‘웨이츄레스’가 술을 나르는 카페가 골목골목 번창했던 것이다. 이들 남촌에서 노는 부류를 ‘혼부라’라고 비아냥거리는 말도 생겨났는데 혼부라란, 일본에서 동경의 긴자 거리를 떠도는 사람들을 일컫는 ‘긴부라’에서 차용한 말로 남촌의 혼마치를 할 일 없이 돌아다니는 형상을 비꼰 것이다. ‘부라부라’는 일본어로 할 일 없이 돌아다니는 형상을 말한다.
당시 경성은 출구 없는 소비도시였다. 1930년대는 일제가 중국대륙 진출이라는 무리수를 두면서 우리나라를 병참기지로 만들어가던 시기였다. 미국발 공황은 세계경제를 잠식했고 식민지 조선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밖으로는 연일 전쟁이 터지고 국내로는 군수물자를 마련하기 위해 일제의 가혹한 착취가 심화되던 시기였던 만큼 국내외의 정치・사회 분위기는 암담했다. 그 와중에 식민지의 발전을 꾀할 리 없던 일제는 경성을 소비도시로만 키워갈 뿐 한반도의 자생력을 키울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계획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경성은 화려한 소비도시의 이면에 결핍의 도시였다. 식민지 상황에서 왜곡되게 이식된 자본주의로 인해 대다수의 조선인들이 희생하는 위에 더러운 친일을 선택한 자와 일본인들만이 만끽할 수 있는 화려하고 세련된 도시였던 것이다.
<암살>은 이런 시대적 분위기와 당시 경성의 모습을 잘 재현하고 있다. 롤스로이스가 돌아다니는 거리에 헐벗은 조선인들의 모습이 오버랩되고, 사이렌 소리에 따라 일장기에 경례를 하는 치욕의 경성 풍경 위로 칼 찬 일본군이 제 나라에서보다 더 주인같이 거리를 활보하는 신을 보면서 왜 주인공들이 친일파를 암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지를, 주인공 안옥윤의 대사처럼 왜 ‘끝까지 싸우는지를 알려줘야 하는지’ 시각적으로 깨달을 수 있게 한다.
<암살>은 화려한 액션과 그만큼 감동적인 대사들의 향연도 좋았지만. 1930년대 경성, 우리의 암울하고 서글펐던 서울의 옛 모습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기에 더욱 의미심장한 영화가 아닌가 한다.
by.김정미(시나리오 작가, 역사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