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영화, 동시대의 조우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서자마자, 영화 속 그들이 있던 바로 그 장소에 서게 되는 경험.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내가 사는 공간-주로 서울을 어떻게 담아내는지 눈여겨보기 시작한 것은 <접속>(장윤현, 1997) 덕분이다.
PC통신 시절의 만남을 순수하고 애틋하게 추억하는 이야기에 장윤현 감독의 1997년 작 <접속>이 소환될 때마다 피식 웃곤 한다. 유니텔 ID ‘해피엔드’가 ‘여인2’에게 자신의 옛 연인을 알고 있느냐 질문하던 대화방 아래는 ‘신촌 번개 야하고 잘 노는 여자만’ 따위의 대화방이 열리고 있었으니까. 그 방면에선 예나 지금이나 별다를 게 있을까 싶다. 그 무렵 하이텔의 이런저런 모임에 나가던 스무 살 언저리의 나는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 채, 처음 만나는 남자와 <접속>을 보기로 약속했다. 그것도 피카디리극장에서.
통신으로 각자의 사랑과 일상에 관해 이야기하던 동현(한석규)와 수현(전도연)이 만나기로 약속한 곳이 바로 피카디리극장이었다. 일방의 기다림으로 보는 사람 속을 바짝 태우다가 결국 마주 선 두 사람이 담백하게 웃던 라스트신. 그때 흐르던 사라 본의 ‘A Lover’s Concerto’의 벅찬 쾌감을 기억하는 분이라면 영화가 끝나자마자 그들과 같은 장소에 서서 마침 엔딩곡까지 흘러나오던 극장 옆의 통유리 커피숍을 올려다보던 순간이 꽤 근사했다는 것을 이해하시리라. 영화 <유 콜 잇 러브>에서 소피 마르소와 뱅상 랭동이 서로의 다름과 개성을 인정하고 광장에서 마주 설 때 캐롤라인 크루거의 주제곡이 흐르던 엔딩을 떠올렸다고 해도, 내가 지금 살아가는 공간을 동시대 한국영화를 통해 접속하는 기쁨을 처음 깨닫게 해준 영화에 대한 애정은 줄지 않았다.
같이 본 남자는 이름도 얼굴도 생각나지 않지만, 하필 평생 각인될 감동의 순간에 내 옆에 있는 것이 당신인가! 마음속으로 불평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만나긴 만났으되 서로를 ‘해피엔드’와 ‘여인2’로 삼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해 가을부터 통신 대화방 대기실에 해피‘앤’드나 여인3, 4, 5, 6, 7(…)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접속> OST는 신물이 날 정도로 여기저기서 흘러나왔고, 영화 속 수현처럼 ‘안구건조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던 것도 아마 내 또래의 공통된 기억일 테다.
어쨌거나 10년쯤 지나 다시 보게 된 <접속>은 당시에는 몰랐던 어떤 분기들을 뒤늦게 깨닫게 했다. 여배우의 발성과 발음이 한결 자연스러워지던 즈음이었고, 공중전화 수화기를 부여잡고 흐느낌을 삼키던 <초록물고기>의 한석규가 단 몇 달 만에 PC통신 화면의 푸른빛을 안경에 담아내며 당대를 대표하는 통신매체의 정서를 훌쩍 뛰어넘던 시기였다. 그리고 한 계절이 지나 외환위기가 터질 줄은 꿈에도 모르던 즈음이었다.__
by.유선주(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