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다르는 <영화사>의 한 에피소드에서 누벨바그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을 부정하는 독특한 주장을 전개한다. 누벨바그는 말 그대로 정말 새로운 시작이었을까? 고다르는 ‘아니’라고 말한다. 누벨바그는 사실 시작이라 생각한 끝이었다. 그들은 비평가로서 영화를 새롭게 발견, 혹은 발굴했을까? 이 또한 아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이미 영화의 죽음이라는 사태였다. 고다르의 이런 수상한 발언은 올해로 50주년을 맞이한 프랑스 누벨바그가 전적으로 앙리 랑글루아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을 사고에 포함시키지 않는다면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고다르, 트뤼포, 로메르, 리베트, 샤브롤 등의 누벨바그리언들은 어느 날 앙리 랑글루아가 50석 규모로 만든 낡고 허름한 메신 거리의 작은 영화의 집을 방문했다. 문패에는 가당치 않게도 ‘영화박물관’이라 적혀 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진정으로 영화의 빛이 탄생했다. 이 빛이란 카누도와 델뤽을 매개로 ‘알고 있다’고 여겼던 영화들, 혹은 주말의 명화에서 접하는 그런 영화들이 아니었다. 누벨바그리언들에게 진정한 영화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영화들, 볼 수 없었던 영화들이었다. 혹은, 장 콕토의 표현을 빌리자면 ‘저주 받은 영화들’이었다. 콕토는 1948년에 아방가르드 영화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Objectif 49’라는 시네클럽을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당시 로베르 브레송, 로저 렌하르트, 장 그레미용, 르네 클레망, 마르셀 카르네 등이 참여했다. 이 시네클럽은 배급이 불가능했던 영화들, 상업적인 실패로 시장에서 사장된 영화들, 시네클럽의 취향과 열정에 어울리는 영화들을 주로 상영했다. 장 콕토의 <무서운 부모들>, 로셀리니의 <독일 영년>, 오손 웰스의 <위대한 앰버슨가> 등이 그런 영화들이었다. 누벨바그리언들이 랑글루아의 시네마테크에서 보았던 영화들은 이런 저주받은 영화들이었다.
미학적 저항의 교두보
랑글루아의 시네마테크는 미학적 저항의 교두보와도 같은 장소였다. 누벨바그리언들이 이곳에서 발견한 것은 영화의 되찾은 시간들이었다. 랑글루아는 50석의 상설관에서 야심 찬 기획으로 전쟁 고아이자 과거가 없는, 혹은 과거를 원치 않는 아이들에게 진정한 과거의 기억을 제공했다. 그 과거란 결국 언제나 뒤늦은 기억들이다. 주로 1930년대에 태어난 누벨바그리언들은 영화 탄생의 순간에 입회하지도, 무성영화의 찬란한 시기를 경험한 자들도 아니었다. 무르나우가 미국에서 <선라이즈>를 촬영할 때, 혹은 그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미국에서 사망했을 때,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또 다른 설립자였던 로테 아이스너조차 그의 존재와 부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간파하지 못했다. 시네마테크의 아이들은 그러므로 무르나우의 ‘일출’을 뒤늦게 접한 자들이다. 그들이 비록 ‘작가주의’를 말했지만 방점은 언제나 작품에 찍혀 있었다. 작가 이전에 작품이, 작가 이후에 작품이 존재한다. 작가는 부재하지만 그의 작품은 여전히 젊고 영원하다. 누벨바그리언들은 작품에서 부재의 빛을 발견한 자들이었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허식에 가득한 이들이 본 영화들을 자랑스럽게 떠들어대는 것과는 다른 일이었다. 누벨바그리언들이 발견한 빛은 이제는 사라진 과거의 흔적, 잔재들이다. 비평은 그 흔적을 더듬어 작품의 유예된 시간성을 회복하는 작업이었다.
전후, 전 세계를 통틀어 하워드 혹스의 영화를 무성에서 유성영화까지, 그리고 코미디, 스릴러, 서부극, 누아르의 영화들을 모두 볼 수 있었던 곳은 단연 랑글루아의 시네마테크뿐이었다. 앙드레 말로가 ‘벽없는 미술관’이라 불렀던 상상의 박물관을 랑글루아는 현실 속에서 실현했다. 영화의 박물관은 영화의 새로운 관계들을 매번의 상영을 통해 회복하는 곳이었다. 범주화나 연대기, 혹은 연상이나 연합에 의해서가 아니라 항구적인 이질성, 생산적인 혼란을 거치면서 영화의 진정한 역사가 창조된다. 랑글루아는 시네마테크의 매번의 상영을 통해 영화의 역사가 과거와의 관계에서 갱신되고 매번 변경된다고 믿었다. 이는 하나의 총체적인 역사가 아니라 일시적이고, 덧없고, 불안정하고 복수적인 영화사의 시간성을 상정하는 기획이었다. 랑글루아의 상영은 영화의 역사를 마치 초현실주의자가 그러했듯이 매번 시공간의 거리와 차이가 있는 영화들 간에 새로운 성좌를 그려낼 수 있게 해주었다. 누벨바그리언들은 랑글루아 덕분에 시네마테크에서 온갖 영화를 뒤범벅으로 볼 수 있는 자유를 누렸고 이는 창조의 자유로 이어졌다. 시네마테크가 없었다면 트뤼포, 샤브롤, 로메르, 고다르의 영화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예술의 소생과 부활
누벨바그리언들에게 시네마테크는 단순히 영화예술의 역사를 배운 장소가 아니었다. 거기서 그들은 영화예술이 소생하고 부활할 수 있다는 믿음을 얻었다. 누벨바그리언들은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보며 그것을 인용한 영화의 도둑들이었지만, 파렴치한 도적들과는 달리 이에 감사할 줄 알았던 최초의 영화인들이다. 이들 가운데 고다르는 가장 멀리 나아갔던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영화 인생이 랑글루아에, 시네마테크에 빚지고 있음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1966년 1월, 고다르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열린 ‘뤼미에르 회고전’의 연설에서 랑글루아와 그의 스태프들에게 끊임없이 감사해하며 “이 자리에는 무르나우와 드브첸코의 유령이 당신들 가운데 자리하고 있습니다. 루브르에 들라크루아와 마네가 있듯이 말입니다. 만약, 시네마테크가 30년, 혹은 40년 전에 존재했다면, 아마도 장 비고는 고몽과의 어려움을 겪은 후에도 위로를 받을 수 있었고, 또 영화를 만들 힘을 회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레타 가르보나 에리 폰 스트로하임 역시 그랬을 것입니다. 프리츠 랑, 오손 웰스, 픽포드, 로셀리니가 시네마테크를 방문했을 때 그들의 얼굴이 감동에 젖어 있던 것을 본 사람이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벤야민의 말을 빌리자면 진정한 역사는 그것의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장소를 표시하는 법이다. 누벨바그리언들은 랑글루아의 시네마테크에서 영화사의 진정한 장소를 발견한 영화의 자식들이자 영화에 빚진 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