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축제’의 기억
인터넷이 없던 1990년대 이전의 제주는 서울과의 물리적인 거리에 비례하여 한국 대중문화의 변방에 있었다. 변방과 중심이 연결되는 몇 안 되는 접점이 공중파 방송, 중앙 일간지, 그리고 극장이었다. 예술 영화는 꿈도 못 꿔도 어쨌든 어지간히 흥행작이다 싶으면 제주에서도 개봉됐다. 하지만 도내를 통틀어 몇 되지 않았던 극장에서 개봉할 수 있는 영화는 한정적이었고, 덕분에 생긴 만성적인 갈증 탓인지 제주의 극장에는 묘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당시 제주 극장에는 따로 예매 시스템이 없었고, 현매를 기준으로 사람 수가 넘쳐도 있는 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타이타닉> 같은 대흥행작이 개봉할 때면 어지간해서는 계단에 앉아서 보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열기가 너무 과해지면, 예컨대 <나홀로집에 2>가 개봉했을 때 같으면 극장 측이 너무 많은 관객을 들인 나머지 사람이 깔려서 다칠 정도였고, 심지어 내 친구 몇몇이 인파에 깔려 정신을 잃은 채 어른들 등에 실려나가는 광경을 보기도 했다. 정말로 ‘블록버스터’였다.
이러한 열광적인 분위기는 단순히 흥행작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예컨대 B급 컬트의 고전 중 하나인 가 <뱀파이어>라는 제목으로 제주에서 개봉했을 때, 당시 초등학생이라 영화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나조차도 대형 스크린의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 사이에 감도는 이상한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후 녹색극장이나 푸른극장 같은 동시상영관에서 <로보캅 2>나 <천녀유혼> 같은 영화를 봤을 때, 그저 대형 TV에 VHS를 재생하고 있을 뿐인 그곳에서 나는 제주의 영화광들 사이에 끼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요컨대 당시 제주의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다른 관객들과의 상호작용이었고, 때때로 그것은 축제가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스무 살이 된 나는 제주를 떠나게 되었고, 그렇게 도착한 서울에선 때마침 ‘극장’이 ‘멀티플렉스’로 바뀌고 있던 와중이었다. 으리으리한 강남에 당연하게도 적응하지 못한 촌놈이 찾아간 곳은 종로2가에 있던 ‘코아아트홀’이었다. 잡담과 웃음과 탄식으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공유하며 류승완의 강력한 데뷔를 경험했던 곳이었고, <무간도 3>의 첫 장면, 스크린을 가득 메운 양조위의 얼굴에 언니들의 교성과 오빠들의 비웃음이 함께했던 곳. 거기서 나는 축제와도 같았던 고향에서의 원경험을 재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멀티플렉스의 거스를 수 없는 대세에 그곳은 얼마 안 되어 사라지고 말았고, 이후로 더 이상 축제는 없게 되었다.
by.고건혁(붕가붕가레코드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