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빛나는 모든 순간 <집시의 시간> (에밀 쿠스트리차, 1989)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집시의 시간>은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소중한 영화다. 고등학생 시절 <수학의 정석>만큼이나 두꺼웠던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읽고 이게 무슨 얘긴가 싶어 멍했던, 그러나 대단히 아름답다고 느꼈던 끌림은 두 시간이 훌쩍 넘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영화의 내러티브를 제대로 이해하기까지 몇 번을 돌려봐야 했고 다시 볼 때마다 장면이 주는 의미는 새롭게 다가왔다.
<집시의 시간>이 매력적인 이유는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의 독특함에 있었다. 기쁘지만 슬프고, 비참하지만 유머러스하고, 타락하고 허무한 삶의 끝에서도 순리처럼 지속되는 삶까지. 정반대의 감정과 삶의 순간을 한 장면에서 보여준다는 것이 생경하면서도 기억에 오랫동안 남았다. 사람의 감정이란 얼마나 복잡하고 미묘한 것인지, 한 마디의 말로 정의 내리기 힘들다는 것을, 영화를 보며 느끼고 또 느꼈다.
한편으로 <집시의 시간>은 대사 위주의 글을 쓰는 나에게 한계가 무엇인지 여실히 느끼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설명적인 대사 없이, 이미지와 음악만으로도 많은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아즈라의 부모에게 거절당한 후 기억도 나지 않는 부모님에 대해 할머니에게 물어본 페란이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다가 꿈을 꾸는 환상적인 시퀀스를 글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강에 모인 수많은 집시들과 횃불이 일렁이는 성 게오르그 축제에서 아즈라와 함께하는 행복한 페란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할머니의 눈물이야말로, “환희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행복과 슬픔까지도”라는 에밀 쿠스트리차의 말을 제대로 표현한 시퀀스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캐릭터나 내러티브를 소홀히 하지도 않았다. 어수룩해 보이던 사생아 페란의 성장 스토리라는 단단한 서사와 진짜 집시 무리 사이에 있을 법한, 한숨과 웃음이 섞이는 다양한 캐릭터는 낯선 세계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영화에, 아니 집시의 인생에선 빼놓을 수 없는 음악. 저주받고 버림받은 인생을 위로하는 고란 브레고비치의 매력적인 음악이 이 영화를 더 돋보이게 했음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통해 유랑, 떠돌이, 사기꾼, 매춘부, 음유시인 같은 단편적인 단어로만 다가오던 집시의 삶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비참함 속에서도 아름답게 빛나는 집시의 삶을 말이다.
앞으로 내가 쓰게 될 극본이 단순히 피상적인 세계에서만 머무르지 않기를, 어설픈 잣대로 타인의 삶을 재단하지 않기를, 영화 <집시의 시간>을 떠올리며 바라본다.
by.류보라(극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