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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집]5월, 영상자료원‘ 수집.복원전’에서 공개될 4편의 발굴영화 ④
나의 첫 작품 <나무들 비탈에 서다>는 1968년에 만들어졌다. 이 작품의 로케이션 현장이었던 서울역 앞 지금의 대우빌딩 자리, 그리고 남대문 삼성 본사, 그 일대는 상상치도 못할, 마치 해골 같은 빌딩의 잔해와 포연이 피어오르는 황량한 폐허였다.
그 못지않게 세상도, 사람들의 의식도 삭막하고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그 엄청났던 전쟁의 후유증으로 방황과 혼돈 속에 있었던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세계가 다 참혹했던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화, 핵의 공포, 그 후유증에서 헤어나지 못해 방황하던 시절, 따라서 세계문학이나 예술의 조류도 주제도 인간의 소외와 고독이었다.
이 황순원 원작의 <나무들 비탈에 서다>도 그런 맥락에서 우리 젊은이들이 겪는 소외와 고독의 근원을 추적한, 다소 무겁고 어두운 작품이다.
동호 현태 윤구는 치열한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전우들인데 이들은 각기 다른 유형의 성격을 지녔다. 작중 인물들이 행동하는 일차적 계기는 전쟁에서 비롯되나 전쟁은 외적계기에 지나지 않고 근본적 갈등의 원인은 상호 간에 부딪치는 자의식의 갈등, 가해와 피해의 관계로 드러난다.
전쟁이 끝나고,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아 다소 여유로운 생활 속에서 의욕을 추스르던 현태는 어느 날 혼잡한 차도에서 신호등의 벨소리에 놀라 충격을 받는다. 붉은색 신호등으로 바뀌면서 울리는 벨소리, 순간 그것은 어느 시골집방 안, 나뒹구는 자명종 시계의 벨, 수색 중에 현태가 방에 뛰어들며 총을 난사한다. 그리고 병풍 뒤에 갓난아이를 안은 채 피투성이가 된 여인이 쓰러진다. 현태는 전쟁 중 아기와 그 엄마를 죽인 일을 지금 벌어지는 일로 착각한다.
잊힌 줄 알았던 전쟁의 상흔이 아직 가시지 않은 것이다. 그는 다시 술에, 여자에 빠진다. 그리고 현태를 좋아하는 기생, 계향에게 추근대는 남자를 찌른다. 시인이라 불릴 만큼 순수하고 이상주의자였던 동호는 연인 숙과의 약속으로 순결을 고집한다. 항상 그런 동호가 가소롭고 못마땅했던 현태는 기어이 동호로 하여금 작부에게 동정을 잃게 한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동호는 자살하게 된다. 한편 현실주의자 윤구는 전쟁에서 체득한 비정함으로 이기적으로 살아간다.
어느 날, 환락 속에 빠진 현태에게 한 여인이 나타난다. 죽은 시인 동호가 그토록 순애했던 숙이다. 그녀는 동호의 죽음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그리고 현태를 압박한다. 쫓기던 현태는 어느 순간, 숙의 순결을 짓밟음으로써 자신과 같은 동류의 피해자로 만든다. 계향에게 추근대는 남자를 찌른 혐의로 현태는 구속되고, 숙은 현태의 아기를 임신한다.
임신한 숙은 아기를 낳을 때까지만이라도 윤구에게 의지하려 그의 돼지농장을 찾으나 윤구는 냉정하게 거절한다.
숙은 현태를 비롯한 모든 젊은이, 자신마저 이 전쟁의 피해자라 생각하며 아기를 낳아 기르겠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비탈에 선 불안한 나무들이기에 더욱 더 그 뿌리는 튼튼하고 집요하게 땅을 파고들 것이다. 더욱 꿋꿋하게.
by.
최하원(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