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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집]내 이웃의 영화관, 이동영사
영화는 탄생 이래 극장뿐 아니라 극장을 벗어난 공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상영되었다. 극장이 아닌 곳에서 비상설적으로 이뤄진 영화 상영은 이동영사로 통칭된다. 세계영화사에서 최초로 기록되는 영화 상영이 ‘그랑 카페(Grand Cafe)’에서 시작된 바와 같이, 이동영사는 극장의 역사보다 앞선다. 한국에서 이동영사는 노천에 설치한 포장을 의미하는 로텐바리(露天張り)로 명명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순회 영업을 의미하는 순업(巡業)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이동영사 역사는 상영 주체와 성격에 따라 계몽과 흥행의 두 갈래로 시작되었다. 흥행의 역사에서 확인되는 이동영사 활동은 1920년대 조선영화계 최고의 성공작<아리랑>(나운규, 1926)의 흥행권을 사들인 임수호 일행의 전국 순업에서 시작된다. 한편, 일본 제국은 조선 침략을 위해 일찌감치 순회 영사를 실시했는데, 통감부(統監府) 시기 영친왕의 일본 유학 생활을 촬영해 창덕궁에서 상영했고, 1920년대 활동사진반에서 촬영한 <조선사정朝鮮事情>(1920)을 일본의 주요 도시에서 순회 상영했다.
1920년대 이동영사는 조선 흥행계와 일본 제국뿐 아니라 계몽과 교육을 앞세운 조선인 청년단체와 노동단체를 통해서도 이뤄졌다. ‘지덕체(知德體)의 힘’을 강조한 각종 지역 청년단체는 지력(知力) 함양(涵養)을 위해 영화를 적극적으로 동원했다. ‘정신수양’과 ‘교육’을 통한 ‘조선신문화’건설을 앞세운 이들의 순회 영화 상영은, 통영청년활동사진대가 군산에 와서 영사한 바와 같이, 지역 간 경계를 넘나들며 진행되었다. 또한 당대 호남평야를 대표하는 군산 지역 정미(米撰)노동조합의 야학(夜學)이 노동자 아동 교육을 위해 ‘활동사진’을 영사했다.
일제강점기 전쟁은 이동영사 활동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과 함께 일제는 조선영화계발협회와 조선영화배급사를 중심으로 전장(戰場)의 소식을 담은 영화를 도시와 농촌에서 순회상영했다. 광복 이후 미군정 주도로 이어진 이동영사는 미군정 지배의 정당성과 미국식 민주주의 가치를 전달하는 영화를 상영했다.
특히 미군정은 1948년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투표 실시를 앞두고 이동영사기 200대를 동원해 전국에 걸쳐 단편 다큐멘터리 순회 영사를 실시했다. 미국 공보 기관의 이동영사 활동은 정부 수립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미공보원(USIS, 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 Korea)은 <리버티뉴스 Liberty News>를 제작, 16mm 필름으로 복사해 ‘이동영화반’을 통해 서울을 벗어나 ‘지방’을 순회하며 상영했다.
6・25전쟁 이후 이동영사 활동이 두드러진 분야는 영화 산업이었다. 1950년대 영화제작자로 활동한 김인기에 따르면, 당시 전국적으로 부족한 극장 때문에 서울 종로3가 중심으로 활동한 흥행업 종사자들이 35mm 필름을 16mm로 축소해 지역 흥행을 다녔으며 그들이 벌어들인 수입이 제작으로 번 돈보다 많았다. 도시를 중심으로 극장 숫자가 늘어난 1950년대 중후반 이후에도 비도시 지역 이동영사 수요는 줄어들지 않았다. 군(郡) 단위 지역 극장 개관은 1960년대 중후반부터 시작됐지만, 비도시 지역 노동의 특성은 이동영사를 오래도록 지속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즉, 비도시 지역 극장은 읍(邑) 소재지에 자리를 잡아서 면(面) 단위 이하 마을 거주민의 접근성이 떨어졌다. 대중교통도 발달하지 않아서 극장 영화 관람은 특별히 ‘장날에 일보러’ 갔다가 생긴 자투리 시간에 가능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도시와 달리 절기(節氣)와 일기(日氣)의 변화에 순응해야 하는 비도시 농어촌 지역민에게 영화는 찾아가기보다 ‘찾아와주는’ 편이 좋았다. 학교 운동장이나 마을공터에 말뚝을 박고 포장을 둘러치면 순식간에 ‘훌륭한’ 극장으로 변신하는 이동영사는 환영을 받았다. 따라서 겨울 추위가 매서운 한때를 잠깐 제외하고 사계절에 걸쳐 열린 이동영사의 가설극장은 지역에 따라 1970년대 후반까지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비도시 지역에서 주로 활동한 순업은 7~8명의 개인이 모여 ‘○○영화사’ 또는 ‘○○영화반’이라는 이름을 걸고 운영되었다. 영사기사, 말뚝과 포장을 포함한 발전기와 마이크 및 스피커 등 기자재 운반과 설치 담당자, 그리고 영화표 판매와 입장객 관리자가 이들 일행에 속했는데, 경우에 따라 변사(辯士)도 이들을 따랐다. 1950년대 후반, 순업이 사용한 영사기 대부분은 필름에 녹음된 사운드를 증폭시킬 수 없어서 영화 내용을 전달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재정이 넉넉지 않은 순업은 전문 변사가 아니라 영사기사가 역할을 병행했다.
영화 시장 발전을 견인하다
이동영사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본격적인 영화 흥행 수익을 발생시킨 것은 1950년대 후반 국산영화 제작 증가와 필름 간접 배급 체계가 정착되면서부터다. 국산영화 양산과 영화 배급사의 치열한 경쟁은 개봉관과 재개봉관이라는 극장의 서열을 가져왔다. 이동영사는 서열의 마지막을 차지했지만, 이동영사 시장도 만만치 않아 순업 흥행사를 상대로 필름을 공급하고 영사기자재 일체를 대여하는 회사도 생겨났다.
1960년대 대전시 합동영화사는 영사 장비 대여와 회수 전문 담당 직원까지 고용해 충청도와 경기도는 물론 경상도 일대 순업과 폭넓게 거래했다. 극장과 비교해 순업의 필름은 상대적으로 질이 떨어지고 입장료도 저렴했지만, 입장객 숫자에 따른 흥행 측면에서 1960년대 중반 읍 소재지 극장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이동영사 관계자들이 순업의 쇠퇴를 극장으로의 관객 분산보다 TV의 출현을 꼽고 있다는 점에서, 비도시 지역에서의 이동영사의 시장성을 확인할 수 있다.
6・25전쟁 이후 이동영사 흥행의 길에 접어든 사람들의 사연은 제각각이었다. 시작한 이유가 무엇이든 순업은 “주먹도 잘 쓰고 말도 잘하고 술도 잘 먹고” 때에 따라 “연애도 잘”해야 했다. 지연(地緣)과 학연 그리고 혈연의 논리가 앞선 비도시 지역 마을의 텃세에 대항하면서도 붙임성이 좋아야 순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60~1970년대 비도시 지역의 이동영사는 흥행사만의 차지는 아니었다. 지역 문화원(文化院)의 주요 사업 역시 영화 상영을 포함하고 있었다. 자신의 ‘고향’ 발전에 헌신적으로 참여한 문화원 관계자들은 경량의 16mm 영사기와 스크린(screen)을 둘러 메고 자연 부락까지 돌면서 대한뉴스와 문화영화는 물론 극영화를 상영했다.
한편, 이동영사의 방향은 계몽과 흥행의 두 갈래였지만 지역민 관객의 입장에서 그들 사이 엄밀한 차이는 없었다. 이동영사에 의해 가설극장이 열리는 날은 일종의 작은 마을 축제와도 같았다. 지역민들은 스크린이 세워진 장소를 중심으로 반경 8km 이내에서 모여들었다. 흥행 순업이든 문화원이든 그들이 상영한 영화는 최소 극장 개봉 이후 1년이 지났거나 흥행작의 경우 3~4년이 지난 것도 있었지만 환영을 받았다. 이동영사는 영화 상영과 관람만을 의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설극장이 열린 다음 날이면 으레 ‘보리밭 연애 사건’으로 동네가 시끄러웠던 것처럼, 이동영사의 출현은 가난한 청춘들의 마음을 흔든 일대 ‘사건(event)’이었다. 무엇보다도, 순회 영화 상영과 관람은 도시 문화를 대체(代替)하는 경험이었으며 가설극장은 지역민의 세상과 다른 세상을 연결하는 네트워크(network) 형성 장소였다. 가설극장에서 만난 지역민 간 정보 전달과 교환을 비롯한 순업 일행은 그 자체로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미디어(media)였다. 하지만 순업 일행이 각 지역을 돌며 직접 체험하고 수집한 정보는 국가가 제작한 대한뉴스와 문화영화의 내용을 재해석할 여지를 동시에 제공하고 있었다.
요컨대, 이동영사는 TV(특히, 컬러 TV)의 등장 이전까지 영화 소비 시장을 확대시키고 비도시 지역민의 주요 영화관람 방식이 되었으며, 지역 커뮤니티(community)의 문화 변동 계기로 작용하면서 세계상에 대한 다층적 해석을 가져온 존재였다. 흥행사에 따라 1990년대 후반까지 울릉도 같은 도서 지역에서 활동한 사실에 비춰, 한국영화사 연구는 극장을 벗어나 이뤄져야 할 것이다.
by.
위경혜(영화사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