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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희]김지운 감독이 추천하는 <삼포 가는 길>
오해했었다.
그러니까 영화를 보기 전까지 나에게 이만희 감독의 <삼포 가는 길>은 황석영의 단편을 영화화했다는 정보와 설원 위의 서정적인 스틸에서 풍기는 영상미가 돋보이는 문예영화란 느낌이 전부였다. 오프닝 신은 분명히 회화 같은 설원 풍경을 프레임에 잡는다. 정말 아름답다. 그러다가 화면 오른쪽으로 인물하나가 그림 같은 구도를 깨부수며 들어온다. 드러난 엉덩이를 끌어올린 내복으로 겨우 감추고, 걸치지도 못한 상의에 한쪽 팔을 힘겹게 꿰며 연신 토해내는 불평과 함께 화면 안으로 뛰어들듯 들어온다. 그는 노영달(백일섭)이란 뜨내기 청년으로 어디선가 쫓겨온 것이 틀림없다. 화면 안으로의 첫 등장이 화면 밖어디선가로부터 밀려들어오는 설정의 인물소개는 의미심장하며 이 심장한 의미의 상징적 설정은 영화 내내 반복될 뿐 아니라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다.
“이제 어디로 가느냐가 문제로다.”
그리고 불평 뒤의 첫 대사는 “이제 어디로 가느냐가 문제로다.” 노영달의 정처 없는 발걸음은 몇 걸음 옮기지도 못한 채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뜨내기 나그네로 보이는 정씨(김진규)와 합류한다. 갈 곳도, 오라는 데도 없는 노영달은 삼포라는 확실한 지명을 찾아가는 정씨를 따르기로 한다. 그들은 눈밭 위에서 담뱃불을 주고받고 함께 오줌을 갈기는 시정잡배들의 의식을 통해 길동무로서의 암묵적인 연대를 표한다. (뒤에 정씨와 노영달이 백화를 만날 때도 백화는 길거리에 주저앉아 마찬가지로 노상방뇨를 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악동의 악취미적인 장치인지 모르겠지만 생물학적이고 본성에 충실한 밑바닥 인생들의 비루한 공유감만은 틀림없이 밀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술배가 고파 들른 식당에서 도망 간 술집 작부 백화(문숙)를 잡아오면 사례하겠다는 약속을 식당 주인에게 받은 노영달은 정씨를 부추겨 또다시 길을 떠난다. 이번에는 확실한 목표가 생겼지만 꼭 그런 것이 아니어도 그들이 그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길을 떠나야 하는 알량한 동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못 가 자기 배로 사단 병력이 지나갔다고 앙탈하고 일갈하는 백화를 역시 길 위에서 만난다. 세 사람의 만남은 처음부터 티격태격 다투고 서로를 조롱하고 멸시하고 상처를 건들며 흩어지지만 내심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란 동질감을 느끼고 길지 않은 시간 안에 재회한다. 이렇게 된 이상 노영달과 백화는 정씨의 고향인 삼포를 자신들 마음의 고향으로 삼아 셋이 함께 길을 떠나며 여정의 시작을 알린다.
영화를 보기 전 동시대 한국영화의 또 한 명의 천재였던 하길종 감독의 평론을 먼저 읽었는데 하길종 감독은 이만희 감독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실패작이라고 평했다. 그 이유로 ‘연출자의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원작 해석에 대한 시나리오 작가의 변칙적 각색과 등장인물에 대한 성격 파악 실패, 전체 톤의 통일성을 상실한’ 것으로 보았다. 워낙 하길종 감독의 영화글을 좋아해서 별 저항이나 의심 없이 그의 견해를 수용하고 있었는데 영화를 보고나니 나는 하길종 감독의 애정 어린 지적들에 대해 애정 품은 변호로 이 영화를 지켜주고 싶어졌다.
먼저 하길종 감독은 노영달의 과장 섞인 연기를 지적했다. 하길종 감독은 “영달은 덩치가 크며 바보스럽고 감상에 젖어 눈물을 질질 흘리는 그런 사내가 아니다. 작달막하고 우직하며 항시 버림받는 모습의 영달은 인간 본연의 원시적인 고뇌의 형상을 지닌 인물이다. 또 백화와 헤어지면서 계란을 사주며 이유 없는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고 엉엉 우는 그런 영달이 아니라 숙명적으로 홀로임을 인식하고 이를 천성적으로 인내하는 그런 청년”이라고 쓴다. 원작의 노영달은 그러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 어디서든 당장 한 끼 밥으로 속을 채우고 술 한잔으로 차가워진 몸뚱이를 데워야 하는 길 위에 내몰린 뜨내기들의 삶에 대한 인내심이란, 하길종 감독이 말하는 숙명적으로 달관한 비극적인 인물이 아니라 영화에서 보듯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허튼짓으로라도 웃고 넘겨야 하는, 그것 아니고는 달리 극복해낼 방법이 없는 백일섭이 더 현실적이고 더 노영달스럽고 더 비극적인 하류 인생의 인내심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그가 바보여서 바보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 방식으로서 바보 같은 몸짓을 과장해 보이는 것으로 자신의 비루함을 딛고 견디어나가는 것으로 보았다.
백화 역의 문숙에 대해서 하길종은 더욱 신랄하게 비평한다. “문숙은 영달의 경우보다 더 무성격이다. 백화의 과장된 행위 속에 짙은 애수가 도사리고 있어야 하는데 문숙에게는 고뇌의 표정이 없다. 건성거리고 재잘대며 눈밭 위에 던져진 미꾸라지처럼 팔딱거릴 뿐이다”
분명히 맞는 말이다. 그렇게 보인다. 더욱이 문숙의 마스크는 그 시대에 있을 수 없는 얼굴과 패션을 가진 미확인물체의 여배우였다. 느닷없이 타임머신이 뚝 떨고 간 미래에서 온 서구적이고 도회적이며 모던한 마스크의 신성이었으니 하길종이 말하는 온갖 풍상을 다 겪은 시골 술집의 작부상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녀는 대사할 때도 커다란 입술의 한쪽을 찌그러뜨리고 일그러뜨린다. 무언가 현대적이고 도회적인 철부지 여자들의 투정 부리는 연기처럼 보인다. 울 때도 그냥 울음보가 툭 터지듯 입을 크게 벌리고 아기처럼 앙 하고 운다. 문숙의 백화는 자신의 고달픈 삶을 속으로 끌어안고 명치 끝 저 안쪽으로 꾹꾹 눌러 감추는 애수와 고뇌 어린 시골 작부가 분명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울 때 따라 울었다. 헤어지는 영달에게 “나 아기 낳을 수도 있어. 사실은 그렇게 남자들 경험 많지 않아.” 라고 소녀가 어른 흉내 내듯 고뇌 없이 애수 없이 뇌까리듯 말할 때, 그녀가 건들거리고 미꾸라지 같은 팔딱거림이 더 팔딱거릴수록 더욱 그 공허함으로 애잔한 마음으로 쓰리게 아려온다. 이만희는 분명 백화를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길>에 등장하는 젤 소미나로 그린듯하다. 마지막, 대합실에서 노영달과 헤어지는 장면에서 병든 젤 소미나를 두고 떠나는 잠파노의 통렬하고 비장함을 품은 영화 <길>의 클라이맥스 장면이 오버랩되었다. 온갖 풍상을 겪은 유곽의 노련한 작부가 아니어서, 길거리에 방치된 백치아이 같아서 난 더 가슴 한켠이 더 저려왔다.
백화에게 영달은 목포로 돌아가라며 기차표를 손에 얹어주고 남은 여비를 탈탈 털고 계란 두 개와 빵을 품에 안겨준다. 돌아서는 영달의 손에 계란을 옮겨주며 목이 멜 테니 물 마시고 먹으라고 말하며, 그리고 아무한테도 가르쳐주지 않은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는 백화의 텅 빈 표정에서 대책 없이 방치된 아이의 표정을 읽고, 그 불확실한 전망의 불안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만다. 그리고 모두들 다시 떠난다.
하지만 떠난 줄 알았던 백화가 텅 비어 썰렁한 대합실에 어기적거리며 주눅 든 표정으로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 가방에서 영달이 준 빵을 꺼내 한입 베어 문다. 백화는 살려고 빵을 문다. 그리고 깨진 유리창 건너편 기차역 술집을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반짝거린다. 나는 문숙의 건성대고 텅 빈 얼굴 위에 성과 속을 다 얹혀보았다.
끝으로 하길종은 이렇게 글을 맺는다. “한국영화사상 불후의 명화가 탄생할 수 있는 순간에, 무엇 때문에 우울한 패전으로 끝나고 말았는지 그 신비를 알 길이 없다.” 하길종은 이렇게 불균질하고 영화적 논리성이 없는 인물 묘사와 기법에 아쉬움을 토로한다. 나는 이만희 감독이 이 작품을 치밀한 영화적 논리성이 아니라 그냥 측은지심의 사람에 대한 연민의 마음으로 그린 영화라고 옹호해본다.
영원한 타향에 갇힌 이들에게 건네는 위로
가진 게 없는 자의, 더 이상 내줄 게 없는 자의 마지막 따뜻한 말 한마디는 그것은 말 한마디가 아니라 자신의 남은 몸뚱이와 속을 다 얹혀주는 것이다. 영달은 백화에게, 정씨는 영달에게, 백화는 이 두 남자에게 가진 것을 다 털어준다. 더 이상 줄 게 없어서 마지막 작별 인사에 몸뚱이와 내장 속을 다 담아 다 털어주고 떠난다. 영달은 버스에서 만난 일거리를 찾아가는 패들과 합류하고 고향을 찾은 정씨는 몰라보게 변한 고향 삼포로 들어선다.
결국 그렇게 찾으려던 고향 삼포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심혈을 기울여 찍은 대합실 이별 장면에서부터 마지막 삼포로 들어가는 다리 위의 버스 원경 샷까지 모두 이만희 감독의 사람을 대하는 마음의 결이 짠하게 느껴졌다. 이만희 감독은 51편의 영화를 만든 사람인데도 마지막 영화에 설원 위를 미꾸라지처럼 더 빨딱거리고 더 어린애처럼 엉엉 울고, 주머니에 꼬불친 여비 다 던져주고 따뜻한 말 한마디를 더 얹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내주고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세상과 작별한다.
그래서 난 삼포로 가는 길, 정작 그 아무도 가지 못했던 곳, 아무도 닿지 못한 그 삼포에 마지막으로 따뜻한 위로의 말을 작별인사 삼아 남아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고 비로소 이만희 감독은 그곳으로 떠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by.
김지운(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