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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극영화]‘꿈꾸는 역사’로서의 사극
사극(historical drama)이란 역사를 드라마로 각색한 장르를 지칭한다. 역사가 사실이라면 드라마는 허구다. 이렇게 상반된 둘이 만날 수 있었던 조건은 역사의 내용이 드라마라는 형식에 담기는 역할분담을 했기 때문이다. 이 둘의 결합을 섹시하게 표현하면, 역사라는 정자가 드라마라는 자궁에 착상됨으로써 사극이라는 자식이 탄생했다.
사극 - 역사의 불륜인가, 드라마의 로맨스인가
문제는 이렇게 태어난 사극을 누구의 족보에 올리느냐다. 사극은 일반적으로 역사가 아닌 드라마의 한 장르로 여겨진다. 역사가들에게 사극은 역사의 사생아다. 드라마라는 밭에 역사라는 씨가 뿌려지지 않았다면 사극은 생겨날 수 없었다고 믿는 역사가들은 사극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면서 사극의 탈선을 꾸짖는다. 이에 반해 사극 제작자들의 반응은 유쾌하고 관대하다. 그들은 역사와의 결합을 로맨스로 즐기며 사극은 엄연히 자신들의 자식으로 입적돼 있음을 역사가들이 인정하라고 주장한다.
역사와 드라마의 자식인 사극은 부모 세대의 영광을 능가하게 성장했다. 대중문화에서 사극 열풍은 끊임없이 불고 있다. 특히 영화에서의 성장은 눈부시다. <왕의 남자>(이준익, 2005)에 이어 <명량>(김한민, 2014)이 1760만 명 관객이라는 한국영화사의 흥행 신기록을 경신했다.
정통사극 장르에서의 고증
세상이 변하면 남녀 관계도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사극은 성장하면서 장르를 진화시켰다. 사극은 어릴 적 역사라는 엄부(嚴父) 밑에서 아버지를 모방하는 것으로 자의식을 형성했다. 이것이 이른바 정통사극이다. 정통사극은 역사의 내용을 드라마 형식으로 충실히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왕조시대 왕, 장군, 신하와 위대한 업적을 남긴 위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정사의 기록을 근거로 해 드라마로 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끔은 왕비를 비롯한 궁중 여인들의 암투가 야사를 참조해 그려졌다. 과거는 신도 바꿀 수 없는 정해진 사실이지만, 역사는 끊임없이 다시 서술되는 이야기다. 현재를 사는 우리가 과거 속으로 들어가 질문을 제기해 답을 얻고자 하는 노력으로 역사는 계속해서 다시 써진다. 역사 이야기를 구성할 때, 시작에 해당하는 1과 끝인 2는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과거의 사실들이다. 하지만 1과 2사이에 소수점이 무한대로 있는 것처럼 역사 이야기는 주제를 끊임없이 변주할 수 있다. 아무튼 정통사극은 사실은 진실이고 허구는 거짓이라는 사실주의 문법에 의거해서, 과거의 거울에 현재의 문제를 비춰서 답을 제안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당대사가 아닌 경우 사료의 증언을 통해서만 과거가 실제 어떠했는지를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역사적 사실을 전하는 사료는 거의 언제나 과거의 전모를 파악하기에는 부족하고 불완전하다. 역사가들은 사료의 파편들을 갖고 퍼즐 맞추기를 하듯이 과거의 진실을 재현하고자 한다. 사료와 사료 사이의 틈새를 보완하고 연결하는 것은 역사적 상상력이다.
역사적 상상력을 얼마나 많이 어떻게 발휘하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고 역사의 진실이 바뀐다. 그런데 문제는 역사적 상상력을 사용하는 정도와 그 문제의식을 결정하는 것은 역사의 내용이 아니라, 그 내용을 담아내는 그릇에 해당하는 드라마의 형식이라는 점이다. 역사적 사실들의 인과관계를 엮어내고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은 드라마적 상상력으로 구성되는 플롯이다. 정통사극은 이 같은 역사의 문학성을 무시하고 역사적 사실로 드라마적 상상력을 구속하는 가부장적 질서에 입각해서 이야기를 창작했다.
팩션사극과 픽션사극, 사극의 진화인가 종말인가
팩션사극은 정통사극의 이 같은 가부장적 위계질서를 해체해 드라마적 상상력을 해방시킨다는 문제의식으로 나왔다. 팩션사극은 이야기 구성에 필요한 역사적 사실의 결핍을 보완하는 차원을 넘어서 역사적 사실을 만드는 방향으로 드라마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성립했다. 예컨대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를 낳은 것은 ‘연산군 일기’의 한 구절이다. “공길이 <논어>를 외워 말하기를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면 아무리 곡식이 있더라도 내가 먹을 수 있으랴’.” 공길이 연산군에게 이 말을 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왕의 남자> 이야기는 허구다. <광해, 왕이 된 남자>(추창민, 2012) 역시 동일한 팩션사극이다. 이 영화는 “광해군 8년 2월 28일, ‘숨겨야 할 일들은 기록에 남기지 말라 이르라.’”라는 한 구절을 모티프로 하여, ‘광해군 일기’에 기록되지 않은 15일 동안의 일들에 대한 역사적 상상력의 나래를 펼쳤다.
팩션사극의 출현은 역사와 드라마 사이의 결합 방식의 변화와 함께 목적과 수단의 전도를 가져왔다. 역사의 목적을 위해 드라마를 수단으로 사용하는 정통사극이 ‘역사드라마’라면, 역사를 드라마의 수단으로 전유하는 팩션사극은 ‘드라마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같은 변화는 사극의 진화인가, 종말인가?
이 논쟁에 결정적으로 불을 붙인 것은 픽션사극의 출현이다. 정통사극과 팩션사극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서 과거를 재현하고자 했다. 정통사극이 역사적 사실들의 퍼즐 맞추기로 과거의 전모를 복원하고자 노력했던 데 비해, 팩션사극은 역사적 사실들을 물감으로 사용해 과거의 풍경을 그려내고자 했다. 이 둘 사이의 논쟁의 쟁점은 퍼즐 맞추기와 풍경화 그리기 가운데 무엇이 더 많은 역사의 진실을 잘 보여줄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이에 반해 픽션사극은 역사적 사실들을 재료로 해 과거의 풍경을 구상화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물감과 물감을 혼합하는 시대착오로 추상화를 창작한다. 과연 이같은 추상화도 사극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근대 사실주의 문법은 사실만이 진실이고 허구는 거짓이라는 공리에 근거해 성립했다. 이 문법에 따르면, 역사는 문학보다 인간 삶의 진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반대의 주장을 펼쳤다.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하는 역사는 이미 지나간 개별적인 것에 대해서만 증언하지만, 일어날 법한 일을 이야기하는 문학은 보편적인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문제의 본질은 사실과 상상력 가운데 무엇이 진실인가를 둘러싼 쟁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둘은 양자택일이 아니라 둘 사이의 조합과 역할 분담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문제다. 마찬가지로 역사와 사극 간의 이상적인 관계 설정이 무엇인지에 대해 함께 토의해보는 것이 생산적인 논쟁을 위한 지향점이라고 나는 믿는다.
‘아바타 사극’으로서 픽션사극
인간은 현실과 꿈이라는 두 세계에 살고 있다. 지구상에서 인간만이 문명을 건설한 유일한 생명체가 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현실 세계를 넘어서 꿈꾸는 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상징적 언어의 소통 능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결국 역사와 사극은 인간의 이 두 세계와 연관돼 있다. 요컨대 현실과 꿈의 두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은 과거 현실을 재현하는 역사와 더불어 ‘꿈꾸는 역사’로서 사극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었다.
이병주는 <산하>에서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고 썼다. 역사와 신화는 빛과 그림자로 인간사 동전의 양면이다. 역사가들이 기록했던 과거의 사실은 대부분이 양지의 역사다. 그것에 의해 추방된 음지의 역사는 달빛에 물듦으로써 신화나 설화가 된다. 신화와 설화는 거짓이 아니라 꿈의 서사다. 현실을 비추는 거울로서 역사는 꿈꾸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하다. 이 같은 결핍이 ‘꿈꾸는 역사’로서 사극 장르를 만들어낸 요인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삶의 또 다른 대안적 거울을 추구하는 인간의 열망이 픽션사극에 이르기까지 사극의 변형을 이끌었다. 따라서 계속 이어지는 사극 신드롬은 우리 시대 역사가들이 대중과 소통하는 역사를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같은 결핍을 ‘꿈꾸는 역사’를 통해 보상받고자 하는 대중의 욕망이 유발한 증후군이다.
문제는 이 같은 증후군이 날마다 새로운 지식과 문제로부터 발생하는 삶의 병리학에서 기인한다는 점이다. 디지털 시대에서 아날로그 시대를 살았던 아버지 세대는 권위를 상실하고 뒷방으로 물러났다. 그들뿐 아니라 지식과 정보의 증가 속도가 마침내 특이점을 넘어서는 단계로 접어드는 문명사적인 전환기에서 삶의 나침판 상실은 모든 사람의 문제가 되고 있다. 소설가 김영하는 “이전 세대의 경험과 규칙이 시시각각 무화(無化)되는 세계에서 혼자 살아남아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 고아”라고 말했다. 아버지 없는 세대, 아니 오히려 아버지가 아들에게 배워야 하는 시대에 역사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픽션사극은 이 같은 역사의 종말 시대에서 고아들이 만들어낸 역사 이야기다. 고아들은 역사라는 과거 인물들의 도서관에 가서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 시대가 갈망하는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가상 역사의 인물이 <해품달>의 이훤과 같은 왕이다. 그는 세종, 중종, 숙종의 퓨전이며 컨버전스(convergence)로 만들어진 우리 시대 대중이 꿈꾸는 지도자의 ‘아바타’다. 이 같은 인간의 열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사극의 진화는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자식의 탈선에 대한 역사가들의 꾸지람과 염려 또한 끊이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런 부친 살해로 인간의 문명은 발전한다.
by.
김기봉(경기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