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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스트]‘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는 진화한다
1990년대 말부터 산업화의 틀을 본격적으로 갖추어간 한국영화는 2000년대 들어 해외에서도 주목하는 작가들이 연속적으로 배출되면서 나라 안팎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기 시작했다. 특히 2000년에서 2004년 사이 5년간 등장한 한국영화 감독들은 이후 10년 이상 지난 지금까지도 해외에서 ‘한국영화(Korean Cinema)’라는 브랜드를 확고히 만든 주역들이다. 임권택, 이창동, 김기덕, 박찬욱, 홍상수 감독은 당시 세계 3대 영화제를 비롯한 주요 무대에서 각자만의 작가 세계를 구축하며 한국영화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민족과 전통, 사회문제, 독창적인 미학과 개성 있는 캐릭터들을 반영한 이들의 영화에는 다른 데서는 찾기 힘든, 독특한 작가적 스타일이 존재했다.
이후 2000년대 중반에서 후반까지도 새로운 작가들이 계속해서 등장했다. 김지운, 봉준호, 류승완, 임상수, 이재용이 그 차세대 작가의 일군이다. 이들은 여전히 이전의 감독들처럼 자신만의 색깔을 유지하면서도 액션, 판타지 등 상업적인 장르영화에 대한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었다. 2000년대 해외시장에서의 한국영화는 그 자체가 하나의 조류였고 ‘다양성(diversity)’이 가장 큰 특징으로 드러나는 시기이기도 했다.
최근 들어 화려했던 한국영화의 계보를 잇는 재능 있는 감독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우려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과연, 이전 세대를 뛰어넘는 새로운 작가들이 더는 없는 것일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는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장에서 느끼는 바로는, 오히려 과거에 비해 한국영화의 스펙트럼이 훨씬 넓어졌기 때문에 한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 그런 우려를 낳게 하는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다. 200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홈비디오 시장의 붕괴와 디지털 부가판권 시장의 미정착으로 인한 일시적 침체 현상은 한국영화가 해외시장에서 수익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논리로 전환됐고 결국, 글로벌 시장으로의 진출, 글로벌화와 같은 화두가 전반적인 대세가 됐다. 해외로의 진출은 완성작의 수출에서부터 직접 배급, 국제 공동 제작, 현지화01 같은 형태로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다. 따라서 지난 2000년대에 해외 영화제를 통해 발굴되고 주목받은 작가주의 감독군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여러 다른 경우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 최근의 경향이다.
먼저, 작가주의의 계보를 잇는 신인 감독으로는 윤성현, 박정범, 신수원(<명왕성>), 이돈구(<가시꽃>), 정주리(<도희야>), 이용승(<10분>), 이상우(<엄마는 창녀다>), 전규환(<무게>)이 눈에 띈다. 이들은 전 세대가 걸어온 행보처럼 해외 영화제를 플랫폼 삼아 영화를 소개하고 자신을 알리는 방식을 취했다. 대다수 영화제는 항상 신진 감독을 발굴하는 데 주안점을 두기 때문에 이들이 신인 감독으로서 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성공적으로 데뷔하기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들의 영화는 작가마다 각기 다른 개성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그전 해외에 한국영화를 알린 감독들(이창동, 김기덕, 박찬욱)의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지는 못하다. 이들은 많은 부분에서 선배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전 세대의 감독들이 특히 서구 영화감독이나 고전 영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 상황에 비한다면, 지금은 한국 감독 중에서도 닮고 싶은 작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다만, 관객은(해외를 포함한) 언제나 익숙함 속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길 기대하기 때문에 그 높아진 기대치에 부응하기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해외 관계자들이나 관객 중에는 여전히 이전 세대 감독들의 영화에 열광하고, 이들의 신작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기본적으로 매년 영화제마다 새롭게 등장하는 신인 한국 감독들이 있다는 것은 이전에 선배들이 길을 잘 닦아놓은 덕분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감독들이 각자 제대로 자리를 잡으려면, 결국 가장 어려운 과제인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색깔 찾기 즉, 꾸준한 활동으로 본인만의 스타일을 구축해나가야만 할 것이다.
한국영화의 해외시장 진출에 나타나는 또 다른 경향은 상업성을 겨냥한 글로벌 프로젝트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신인보다는 국내에서 검증받은 감독들의 활약이 더 두드러진다. 아무래도 할리우드에 도전하는 한국영화는 자본과 규모의 힘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해외시장에서 인지도가 있는 감독의 작품인 경우가 많다. 2013년에는 박찬욱 감독(<스토커>), 김지운 감독(<라스트 스탠드>)이 할리우드로 진출해 작품 활동을 하는가 하면, 봉준호 감독 역시 여러 시행착오 끝에 만들어진 결정체와도 같은 <설국열차>를 완성시켜 해외에서 한국영화 사상 초유의 기록을 세워가고 있다. 국제 공동 제작을 위한 다양한 시도는 200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해02 공동 투자에서부터 인력의 해외 진출, 로케이션 유치 등 점차 그 외연을 넓혀왔다.
과거의 한국영화가 지역과 민족으로서의 뚜렷한 특징을 보여주었다면, 최근의 한국영화는 기존에 없던 다양한 형태로 기획, 제작되고 있다. 해외시장 진출을 위해 더욱 공격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고 이러한 전략이 비교적 성공한 사례도 여럿 나타나고 있다. 일례로 중국 시장을 타깃으로 기획, 제작된 <이별계약>(오기환, 2013)은 2001년 제작된 한국영화 <선물>을 현지 시장에 적합한 형태로 각색,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개봉 이틀 만에 제작비(약 54억 원)를 회수하고 최종적으로 약 364억 원의 매출을 올린 작품이다. 한편, 할리우드 스타 배우들이 출연하고, 다국적 제작팀이 모여 완성한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세계 17개국에 판매됐고, 지난 6월 말부터는 미국에서 8개관 개봉을 시작으로 보름 만에 356개관으로 상영관 확대, 같은 날 SPVOD(Special Premium VOD) 서비스도 개시해 미국 내 주요 VOD 플랫폼에서 상위권에 진입하는 등 긍정적인 성과를 올리고 있다. 아직 최종적인 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미국 시장을 놓고 봤을 때, 역대 한국영화 중에서는 단연 대외적으로나 상업적으로 큰 성과를 낳을 것이라 예측되고 있다. 더군다나 올해 초 미국에서의 개봉 버전에 대해 여러 가지 풍문과 우려가 많았으나 결국은 감독의 오리지널 버전으로 상영하게 됐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한국이나 유럽과는 달리 할리우드는 철저히 제작 스튜디오 중심으로 움직이는 체제이기 때문에, 오래전 미국 시장에 진출한 다른 아시아계 감독들의 경우에도 스튜디오에서 요구하는 바에 최대한 맞춰 작업해오곤 해서, 이번 <설국열차>와는 매우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어찌됐든 이번 <설국열차>는 봉준호 감독 자신도 전 세계적으로 다시 한 번 자리매김하는 기회가 됐지만, 한국영화의 해외 시장 진출 가능성도 한층 더 높인 계기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최근에는 타깃 시장에서 직접 제작하거나 현지 영화에 투자하는 방식의 현지화 사업이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는데 할리우드 역시 아시아 시장에 대해 이러한 전략을 시도하고 있다.03 이러한 관점에서 나홍진, 윤종빈 감독은 할리우드에서 같이 일하고 싶은 감독으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이와 같이, 예술영화와 상업영화는 해외시장으로 진출할 때에도 각기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여전히 새로운 작가들은 매년 해외 영화제들을 통해서 소개되는 반면, 처음부터 타깃 시장을 염두에 두고 글로벌 프로젝트를 제작하거나 감독이 현지 시장으로 무대를 옮겨 활동함으로써, 시장으로의 직접 진입을 꾀하는 경우도 잦아지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앞으로도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전망되며, 향후에도 이러한 한국영화의 진화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01 해외 로컬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 또는 합작을 통해 현지 영화처럼 보이는 제작 형태.
02 <묵공>(2006), <워리어스 웨이>(2010), <만추>(2010) 등
03 Fox International Production(Korea)은 한국영화에 직접 투자하는 방식으로
수익을 꾀하고 있다. <런닝맨>(2012)에 이어 최근에는 나홍진 감독의 차기작
<곡성>에 투자를 결정한 바 있다.
by.
김하원(CJ엔터테인먼트 영화사업부문 해외영업팀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