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메뉴 바로가기
하단 바로가기
로고
통합검색
검색
상세검색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서비스
ENG
업데이트
검색
DB
영화글
VOD
컬렉션
업데이트
영화글
기관지
DB
DB 서브
상세검색
작품 DB
인명 DB
소장자료
리스트
영화제
영화글
영화글 서브
연재
한국영화의 퀴어한 허구들
비평, 안녕하십니까
그때의 내가 만났던
명탐정 KOFA: 컬렉션을 파헤치다
사사로운영화리스트
세계영화사의 순간들
임권택X102
기획
칼럼
한국영화 NOW : 영화 공간 아카이빙 프로젝트
종료연재
기관지
VOD
VOD 서브
VOD 이용안내
가이드
VOD 기획전
전체보기
영화
영화인다큐
컬렉션
고객서비스
고객서비스 서브
KMDB 이용안내
온라인 민원
1:1문의
영화인등록
FAQ
오픈API안내
이용안내
파일데이터
Open API
공지사항
로그인
마이페이지
GNB닫기
DB
영화글
VOD
컬렉션
고객서비스
기관지
연재
기획
종료연재
기관지
이전
1346
필자의 글 입니다.
전체게시물(
1
)
[담론과영화]1980년대 이전 영화 저널리즘
필자가 1972년 군복무를 마치고 <주간조선>에 복직하자 영화평론가 김종원 선배가 기자로 와 있었다. 시인이기도 한 그는 주옥같은 세계 명작 영화에 대한 기사를 연재 중이었는데, 기사에 쏟는 정성이 감탄할 정도였다. 잉그리드 버그만, 엘리자베스 테일러, 몽고메리 크리프트, 클라크 게이블 같은 스타들의 이야기를 애정 어린 필치로 엮어내는 문장도 멋졌지만, 더 일품은 사진 자료였다.
1980년대, 복사기도 PC도 없던 아날로그 시절
요즘 같으면 웬만한 영화 스틸이나 인물 사진을 인터넷으로 공유할 수 있지만,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신문사의 영화 자료는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김 선배는 자신의 연재 기사에 들어갈 사진 자료를 직접 챙겨왔다. 대봉투에 영화 제목이나 배우별로 분류해 담아놓은 자료는 거의가 인화된 사진이 아니었다. 일본이나 미국의 영화잡지에서 오려낸 인쇄된 사진을 마분지에 붙여놓은 것들이었는데, 김 선배는 그 자료들을 보물처럼 조심스레 다루었다.
한국의 영화 저널리즘은 1980년대를 기준으로 이전은 이처럼 아날로그 방식의 올드 미디어였고, 이후는 디지털 방식의 뉴미디어로 발전했다. 블로그나 인터넷이 발달한 요즘과는 달리 복사기도 PC도 없이 펜촉에 잉크를 찍어 갱지에 기사를 쓸 정도로 매체 환경이 열악했지만, 영화 기자들의 열정만큼은 지금보다 더 뜨거웠다. 올드 미디어의 단점은 정보의 축적과 검색이 어렵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인터넷으로 검색이 가능하지만 1960~70년대에는 스크랩한 자료를 뒤져야 겨우 원하는 정보를 찾을까 말까 했다. 복사기도 없던 시절이라 신문철에서 기사를 몰래 잘라내려다 조사부장에게 혼쭐이 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영화기자들은 발로 뛰어 특종을 터뜨렸고, 촌철살인의 영화평을 썼다.
‘전설’로 불리는 1세대 영화 기자들의 활동 무대
1950, 60년대는 그야말로 ‘영화 기자의 시대’였다. 6・25전쟁의 상흔으로 암울했던 1950년대 중반 이후 영화는 국민의 유일한 오락거리였다. 할리우드영화는 세계를 보는 창이었으며 꿈의 공장이었다. 이때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한 한국영화 제작은 1960년대 후반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1970년대 접어들면서, TV가 등장한 탓도 있지만 한국영화 제작이 외화수입의 도구로 전락하면서 관객은 등을 돌렸고 영화산업은 불황의 늪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필자는 1975년 조선일보 문화부로 발령 났는데 당시 부장이 영화평론가 정영일 선배였다. 정 부장은 1960년대 초반부터 조선일보 영화 기자로 활약하면서 위트 넘치는 영화평으로 인기를 모았고, TV 주말영화를 육성으로 가이드하면서 “놓치면 후회할 영화” 등의 명대사로 펜들의 사랑을 받았다. 같은 영화 기자라도 정 선배는 1960년대 한국영화 전성기에 기자를 한 1세대이고, 필자는 1970년대 침체기에 활동한 2세대 기자이다보니 영화를 에워싼 환경이나 글쓰기에서도 여러모로 세대차가 났다.
2세대 기자들에게 1세대 영화 기자들의 활동은 여러 면에서 ‘전설’이었다. 영화 제작 편수가 많고 흥행이 잘되다보니 영화 기자들도 그 풍요를 누렸고 영화계로부터 받는 대접도 쏠쏠했다는 것이다. 영화 기자들의 가장 큰 특권은 개봉하기 전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선배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1960년대 전성기 영화 시사회는 영화 기자들의 잔치였다고 한다. 암전 속에서도 메모할 수 있게 책상 위에 스탠드가 설치된 곳에서 각종 음료와 스넥은 물론 담배까지 제공했다는 것이다. 끝나면 충무로나 명동에서 뒤풀이를 했고, 가끔은 당시 최고급 사교장인 아스토리아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스타와 감독들과 양주를 마시며 어울리기도 했다니 그야말로 시네마 천국의 전설이 아닐 수 없다.
영화 저널리즘 활성화한 시네펜클럽
1세대 영화 기자들은 이런 현장을 취재하면서 일부 호사도 누렸으나 고충도 많았다고 한다. 매체 수도 적었지만 신문 지면이 4페이지에 불과했다. 여기에 정치, 경제, 사회 기사와 광고를 싣다보면 영화 기사를 쓸 지면은 우표딱지만 했다. 그래도 마감시간에는 숨이 가빴다. 선배들은 이런 조건에서 새로 나온 영화를 소개하고 원고지 3~4매 분량이지만 영화평을 실었다. 영화계 사건 사고도 취재하고, 정책 비판도 해야해서 쉴틈없이 발로 뛰어야 했다. 선배들의 기억에 따르면 일간신문이 4면으로 확대되고 독자 역시 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1957년 무렵부터 영화 저널리즘이 자생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해 일간신문의 영화 기자들이 중심이 된 ‘시네펜클럽’이 발족된 것은 특기할만한 일이다.
‘시네펜클럽’은 영화 저널리즘에 종사하는 기자들과 영화연구가들로 구성된 친목단체의 성격을 띠었다. 당시 유력한 일간지 영화평란에는 시네펜클럽 회원의 이니셜(이름)을 붙인 단평이 실렸다. 작은 지면이지만 영화의 기초 정보는 물론 기자의 인상을 가미한 전형적인 저널리즘 비평을 시도했고, 이 단평이 독자의 눈길을 끌면서 영화 저널리즘이 활성화했고 영화평론 또한 기틀이 잡히기 시작했다. 당시 시네펜클럽을 중심으로 활동한 기자 및 평론가들은 호현찬・임영・이영일・신우식・김진찬 등이었고, 1960년대에는 정영일・이명원・김종원・안병섭・최백산・최일수・허창・한재수・여수중・정일몽・손기상 선배 등등이 1세대 기자군에 합류했다. 이들이 주축이 되어 1960년 7월 한국영화평론가협회가 결성되었으나 5・16군사정변으로 무산되었다가 1965년 11월 재창립해 월간 <영화예술>을 발간해온 이영일 선배가 초대 회장, 월간 <영화잡지> 편집장 김종원 선배가 총무를 맡았다.
1세대 영화 기자들은 국산영화 면세 조치, 입장세 인하, 영륜(영화윤리전국위원회)의 탄생 등 영화 정책에 대한 여론을 환기시키고 영화계 비리와 문제를 고발하는 등 영화 저널리즘의 견인차 노릇을 했다. 또한 평론가나 학자 등으로 폭을 넓혀 전문성을 살려나가면서 저서들을 냈으며 몇몇 선배는 영화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영화진흥공사 사장을 지낸 호현찬 선배로 유현목 감독의 <아낌없이 주련다>, 김수용 감독의 <갯마을> <날개부인>, 이만희 감독의 <만추> 등을 제작했다.
기자들 발품 팔게 한 ‘키스신 고소 소동’
1950년대 기사 중에는 ‘키스신 고소 소동’도 있다. 1954년 발표된 한형모 감독의 <운명의 손>은 키스신(입술을 살짝 밀착시키는 정도였지만)을 보여주어 관객을 놀라게 했다. 이 영화를 본 여주인공의 남편이 감독을 고소하겠다는 해프닝을 벌였다는 것이다. 1956년의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 논쟁도 뜨거웠다. 정비석의 소설은 서울신문에 연재될 때부터 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영화가 나오자 서울대 법대의 황산성 교수가 교수를 너무 우습게 그려 교수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신문에 발표하자, 원작자인 정비석이 이에 반론을 제기했고, 이후 여러 차례의 논쟁이 벌어졌지만 소설의 주가만 높였다. 1960년 일본에서 영화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전홍식이 신예감독 이성구, 시나리오 작가 김지헌과 함께 <젊은 표정>을 발표하자 영화 기자들은 이들을 ‘한국의 누벨바그’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다. 4・19 때 성난 군중이 자유당 지지 연설을 했다는 이유로 배우 김승호의 집에 방화를 했다. 당황한 김승호는 동아일보 호현찬 기자에게 도움을 청하자 호 기자는 은퇴를 권유하고 그 기사로 특종을 했다. 1961년 홍성기-김지미의 <춘향전>과 신상옥-최은희의 <성춘향>이 맞붙자 매스컴은 경쟁을 부채질했다. 흥행 결과는 신상옥의 완승이었다. 같은 해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이 발표되어 영화 기자들과 평론가들로부터 비상한 주목을 받았고 관객의 반응도 뜨거웠다. 그러나 5・16군사정변으로 상영 중지 명령을 받았다. 정신착란의 실향민 노모가 “가자, 가자” 하는 절규가 북한을 암시한다는 이유였다. 1965년 <7인의 여포로>를 발표한 이만희 감독이 북한 군인들을 지나치게 인간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구속(반공법 위반)된 사건도 크게 보도됐다.
영화의 꽃은 배우들이고 영화 기자들의 관심도 스타들의 근황이나 스캔들에 쏠렸다. 김지미 최무룡 이혼, 청춘스타 신성일 엄앵란의 결혼, 남정임 문희 윤정희의 여배우 트로이카, 스타들을 둘러싼 갖가지 소문과 스캔들은 그 시대 영화 기자들에 의해 대중에게 알려져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1970년대 영화 시책 보도하기에 급급
1970년을 기점으로 한국영화의 황금시대는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제성장에 힘입어 사회 곳곳에서 대중의 욕구가 분출되기 시작했고, 대중문화와 청년문화가 꿈틀대는 한편에선 향락산업의 여파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텔레비전 수상기가 전국적으로 보급되면서 ‘고무신족’으로 불리던 여성 관객들은 안방극장으로 옮겨 앉았다. 장발과 미니스커트가 단속되고, 가수와 배우들이 무더기로 대마초 파동으로 제재를 받았으며, 영화 검열은 더욱 강화됐다.
그런데 당국은 한국영화를 보호 육성한다는 명분으로 영화업을 허가제로 바꾸고 한국영화 3편을 제작하면 외화 쿼터 1편을 주는 시책을 폈다. 이로 인해 한국영화는 외화 쿼터를 받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제작자들은 외화 한 편의 이권을 얻기 위해 저질 영화를 양산했다.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1회용 배우를 출연시켰고 이런 졸속 영화에 관객은 등을 돌렸다. 해마다 두 차례씩 우수 영화심사가 행해지고 여기에 맞추느라 콩볶기 식으로 영화가 만들어졌으나 그건 심사위원용 영화일 뿐이었다.
저항의 목소리 행간에 녹여 시대정신 증언
1970~80년대 영화 저널리즘은 일간지와 연예지로 대별된다. 일간지는 영화 정책이나 영화산업에 초점을 맞춘 반면 연예지는 스타의 사생활과 스캔들에 치중해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1970년대 일간지에는 반공영화, 국책영화와 함께 해마다 바뀌는 영화 시책에 대한 비판이 넘쳐났다. 명색은 한국영화 보호 정책이었으나 기득권을 확보한 제작사들은 외화 쿼터에만 열을 올리고 한국영화에 재투자하지 않았다.
검열과 통제로 경직된 환경에서도 영화인들은 불사조 같은 생명력으로 시대의 거센 파고를 넘었다. 1974년 이장호 감독이 <별들의 고향>으로 돌파구를 열자 김호선 감독이 <겨울 여자>로 선풍을 일으켰고, 여기에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과 <병태와 영자>가 가세해 유신의 서슬 속에서도 작지만 저항의 목소리를 냈으며, 잃었던 관객들을 불러 모았다. 영화인들은 좌절과 역경 속에서도 영화 만들기를 멈추지 않아 호스테스 영화, 하이틴 영화, 문예 영화, 누아르 영화까지 장르영화를 파생시켰다.
이런 와중에서 백건우 윤정희 부부 납북미수 사건, 김지미 나훈아 결혼 발표, 신상옥프로덕션 허가 취소, 홍콩의 최은희 실종 사건 등이 잇달아 일어나 영화 저널리즘을 뜨겁게 달구었다. 미국은 통상협상 때마다 스크린쿼터 페지를 요구하는 등 한국영화계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웠지만 오히려 한국영화는 자생력을 되찾아 천만 관객 시대를 열었다. 이 같은 한국영화 살리기에 필자를 비롯한 2세대 영화 기자들이 열과 성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결론적으로 1980년대 이전 영화 기자들은 영화에 대한 깊은 애정과 투철한 직업의식, 전문성을 바탕으로 이 땅에 영화 저널리즘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영화인들과 공존하며 오늘과 같은 한국영화 융성의 동력을 제공했다고 본다.
사진설명: 영화평론가 이영일(위)과 호현찬 당시 영화제작자(아래). 이영일은 1세대 영화평론가인 동시에 영화사학자로서 후학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만희 감독의 <만추> 등을 제작한 호현찬은 영상자료원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by.
정중헌(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