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하고 비루한 삶의, 미학
내가 시인이 되고 나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주로 언제 시적인 영감(靈感)이 떠오르느냐?”는 것이다. 호기심을 갖고 질문을 던진 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시인 대부분은 영감으로 시를 쓰지 않아요.”라고 답한다.
조금 더 살을 붙여 이야기하자면 시는 장엄한 풍경 앞이나 특별한 감흥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진부하고 비루한 삶 속에서 곪아 터져 나오는 것에 가깝다. 시는 우리의 삶을 꼭 빼닮았으므로 이렇게 탄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사람의 기억에는 특별한 일보다,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의 소소한 일들이 더 많이 담겨 있다. 우리가 타인을 미워하기 시작한 데에는 어떤 사건이 작용했기 마련이지만 타인을 좋아하게 된 것에는 특별한 연유가 없는 것이 보통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주변에는 늘 미운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더 많다는 점이다.
나는 영화를 볼 때에도 크고 중대한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보다 소소한 일들과 깊은 여백들로 구성된 작품을 좋아한다. 지난해 서울독립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최아름·신이수 감독의 영화 <이름들>에는 어느 젊은 시인의 하루가 담겨 있다.
시인의 하루는 인감도장을 파거나, 재미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선배와 술을 마시거나, 일 같지도 않은 일로 상사에게 혼이 나거나, 집 열쇠를 잃어버리는 작은 에피소드를 담은 장면으로 가득 차 있다.
영화를 통틀어 가장 커다란 사건의 등장은 바뀌어버린 자취방의 열쇠를 찾으러 친누나에게 가는 장면에서다. 자전거를 타고 어두운 밤길을 달리며 주인공은 “내가 지나야 할 시간이 많다는 게 언제나 무서웠다고 말하고 싶었어, 누나 나는 무서워.”라는 독백을 남긴다.
하루에도 우리는 몇 번씩이고 두려움을 느끼지만 친한 이에게조차 두렵다고 말하는 것은 인생을 통틀어 채 몇 번도 되지 않을 하나의 사건이다.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이 미덕이라면 두려움을 참고 사는 것은 미련이다. 두려울 때 두렵다고 말하는 것, 그리고 맑은 눈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상대가 있다는 것, 이것은 진부하고 비루한 삶 가운데에서 탄생하는 유일한 미학이다.
필자소개:
박준 _ 시인 mynameisjoon@hanmail.net
시인. 1983년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문학을 잘 배우면 다른 이에게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대학과 대학원에서 알았다. 2008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해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문학동네, 2012)를 발간했다. 제31회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했다.
by.박준(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