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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주년]초기 한국필림보관소에 대한 기억
필자가 ‘한국필림보관소’(현 ‘한국영상자료원’)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74년 당시 문화공보부 국립영화제작소장으로 재직하던 중 한국필림보관소의 비상임 이사를 맡으라는 상부 지시를 받고나서였다. 이 시기는 자국의 영화를 보존하고자 전세계적으로 필름보존기구가 설립되는 중이었고, 우리나라 영화계 역시 이전 20여 년간 국산 영화 진흥정책으로 인해 많은 영화가 제작되고 그 영화에 대한 관리 보존 문제가 대두되는 시점이었다. 이 시대적 흐름에 따라 정부는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 산하에 한국필름보관소를 두게 된 것이다.
야심차게 출발한 한국필림보관소, 그러나
한국필림보관소는 영화진흥공사 상임 이사를 비상임 이사장으로 겸임하도록 했고 이사회는 영화계 전문인사로 구성됐다. 하지만 ‘한국필림보관소’의 시작은 무척 미약했다. 우선 사무실과 필름보존고를 영화진흥공사 사옥 안에 설치, 운영했는데, 공사 사무실, 촬영 세트장, 영사실, 그리고 현상녹음실과 영화인협회 분과별 사무실까지 함께 있어 매우 협소한 필름보존고 하나가 한국필림보관소의 전부였다. 그리고 상주 직원도 세 명뿐이었고 당시만 해도 나라 살림 형편이 필름 보존에까지 미치지 못하던 시대이다보니 운영 예산도 영화진흥공사의 소규모 보조금에 의존해야 했다. 무엇보다 임직원들이 영화계의 도움을 받아 흥행(상영)이 끝난 프린트 필름을 적극적으로 수집했지만 영화의 원판(네거티브 필름)이나 녹음, 복사용 필름은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그러던 중 1984년 필자가 영화진흥공사 이사로 취임하면서 필름보관소 이사장직을 맡게 되었다. 막상 업무를 맡고 보니 문제가 더 심각하게 느껴졌다. 영화필름은 계속 쌓이는데 보존 창고는 비좁아 수집한 필름을 바닥에 쌓아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보존 필름을 목록화하고 관련 도록을 발간하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한국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시기였지만, 당시 북한도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던 국제영상자료원연맹(FIAF)에 옵서버회원국으로 머물 수밖에 없었다. 필자가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FIAF 총회에 참석해서 정회원 가입을 신청했는데 기관의 독립성과 재정자립도로 인해 우리의 요구가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우리는 우선 FIAF의 정회원국이 되는 것을 가장 시급한 과제로 삼고 여기에 힘을 모으기로 했다.
FIAF 회의 참석 결과를 문공부(현 ‘문화체육관광부’)와 영화진흥공사에 보고하고, 우리는 당장 할 수 있는 필름 보유율을 높이고 설비를 확충하는 등 시급한 과제부터 해결해나갔다. 영화계도 호응해 필름을 기증하는 제작사가 늘어났고, 내부 설비도 점진적으로 개선해나갔다. 이런 우리의 노력은 FIAF 연맹 상임 이사인 스웨덴 대표의 방한 시찰로 다소나마 인정받았다. ‘한국필림보관소’의 노력이 세계에 알려진 것이었다.
FIAF 정회원 가입, 그리고 아카이브 시설 확충
그리고 필자는 1985년 뉴욕에서 열린 FIAF 총회에 다시 참석했다. 총회에서 한국의 FIAF 정회원 가입을 정식으로 신청했고 뉴욕에 도착해 현지 주재 공보관 등 외교 라인의 도움을 받아 정회원 가입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10여 개국 대표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데 성공했다. 그 자리에서 우리의 입장과 계획 등을 설명했는데 그때 우리에게 보내온 우호적인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총회 일정에 따라 정회원 가입 안건이 상정되어 먼저 우리의 제안 설명이 있었고 곧바로 투표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과반 이상의 찬성으로 국제영상자료원연맹의 정회원국으로 결정되었다. 이 소식은 외부무에서 문공부로 공식 통보되었고, 다가오는 86 아시아경기대회와 88 서울올림픽과 함께 또 하나의 기쁜 소식이 되었다. 1987년에는 한국필름보관소 이사장이 영화진흥공사 이사 겸직에서 독립했고 예산도 늘어났다. 하지만 기존 시설로는 필름을 온전히 보존할 수 없었기에 더 넓은 필름 보존고를 찾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때마침 서울 우면산 기슭에 건설이 추진되고 있던 예술의전당에 주목하고 건설본부장인 서삼수 씨를 만났다. 서 본부장은 문공부에서 오랜 기간 공직 생활을 함께한 분으로 내 뜻을 잘 수용해주었다. 넓은 창고와 사무실, 영사실, 필름 보존실 등 우리의 요망을 충분히 받아들인 설계도면을 필자가 직접 확인했다. 이후 공사는 차질 없이 진행되었고 필름보관소가 새집으로 이사 가기 전 필자는 임기를 마치고 떠났다.
한국영상자료원의 초창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 시절을 회고하면서, 오늘날 한국영상자료원의 발전에 축하의 뜻을 보낸다.
by.
정연구(한국영상자료원 전임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