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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주년]유럽에서 영화보존의 중요성을 깨닫다
한국영상자료원 설립에 관한 이야기는 필자의 영화 <섬개구리 만세>(1972)에서 시작된다. 전남 신안군의 섬마을 초등학생들의 농구 이야기를 영화화한 <섬개구리 만세>는 1971년 조선일보가 주최하는 청룡영화제에서 감독상을 포함해 6개 부문을 수상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한국영화로는 처음으로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고, 당해 6월(현재는 베를린영화제가 2월에 열리지만 당시에는 매년 6월에 개최되었다) 대표단과 함께 베를린으로 가게 되었다. 대표단은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 김재연 사장, 신상옥 감독, 영화배우 김지미・신성일・오수미・신일룡, 그리고 필자였다. 당시 대표단이 신상옥 감독이 제작한 <이별>(1973)의 출연진으로 꾸려진 것이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권위 있는 국제영화제에 한국의 영화인이 다양하게 참석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으랴.
독일에 도착한 필자는 <섬개구리 만세>가 우수한 코미디 영화이며 수상 가능성이 있다는, 스피켈・디벨트・몰겐 포스트 등 현지 유력 언론의 보도를 접하고 내심 수상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필자의 기대는 어긋나고 말았다. 인도의 사티아질 레이가 제작한 <먼 곳에서 들려오는 천둥소리>가 그랑프리를 수상했고, <섬개구리 만세>는 아쉽게 수상하지 못했다.
수상하지 못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한국의 후진적인 기술력이었다. 당시 전 세계 영화는 동시녹음이 일반화해 있었는데, 한국은 여전히 후시녹음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섬개구리 만세> 역시 후시녹음으로 제작되었는데, 영화제 관계자들은 (목소리와 화면이 따로 노는) 후시녹음으로 인한 결함이 이 영화가 수상하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라고 했다. 후시녹음으로 제작된 영상이 영화제 심사위원뿐 아니라 세계 영화인에게도 무척 어색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영국에서 깨달은 필름 아카이브의 중요성
필자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고 귀국을 미룬 채 주영대사관에 근무하고 있던 고(故) 이수정(후에 문화부장관이 되었다)에게 연락해 영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미약하게나마 동시녹음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마이크 배치에 대한 기술, 사운드 편집, 그리고 음향 조합을 위한 편집 방식 등 필자에게는 무척 낯선 기술이었기에 쉬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머리를 식힐 겸 런던 필름아카이브(BFI) 도서관에 가서 영국의 고전영화를 보았다. 그곳에서 본 작품 중 하나가 훗날 작품 제작에도 영감을 준 <분홍신>(마이크 포웰, 1948)이었다. <모던 타임스>(1936) 등 말로만 전해 듣던 찰리 채플린의 영화들(채플린은 당시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혀 그의 영화를 한국에서 볼 수 없었다), 러시아 혁명의 기수이며 ‘몽타주’ 기법의 창시자로 불리는 에이젠슈타인의 <전함 포템킨>(1925)을 볼 수 있었던 것도 영국이 자랑하는 필름보관소 덕분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깨달은 사실이 있다. 고전영화를 온전하게 보존하고, 관객에게 서비스하는 아카이브의 중요성이다. 우리는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1926)이 제작된 사실은 알고 있지만 정작 이 필름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필자가 만든 초기 영화들 역시 몇 푼 안 되는 돈을 받고 원판을 동남아로 수출한 후 돌려받지 못해 찾을 길이 없었다. 한국에도 영국과 같은 자국 영화 필름을 보존하는 기구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 새로 발족한 영화진흥공사의 상임 이사로 활동하면서 문화부장관에게 라이브러리의 필요성을 건의했다. 이에 한국필림보관소 설립위원회가 결성되고 나도 여기에 합류했다. 그리고 1976년, 멕시코에서 개최된 국제영상자료원연맹총회에서 한국은 옵서버 회원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현재 한국영상자료원은 세계 선진 아카이브와 견주어도 손색없는 훌륭한 시설과 필름 보존고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영상자료원의 발전이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이 지면을 빌려 영화필름은 반드시 두 곳에서 분리 보존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조선시대에도 우리의 슬기로운 조상들은 왕조실록 등 중요한 국가 기록을 오대산과 강화도 등지에 분리 보존하는 지혜를 발휘하지 않았는가? 제주도쯤에 영화 보존고 설립을 생각해볼 일이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우리의 영화 유산을 안전하게 보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by.
정진우(영화감독, 한국필림보관소 설립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