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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영화]01. 기획개발부터 투자 결정, ‘케바케’ 아니겠어요?
영화 기획개발 과정의 ‘비밀’을 알고 싶은 사람이 솔직한 답변을 듣게 된다면, 그 답은 이렇게 세 글자로 정리될 것이다. 케바케. 케이스 바이 케이스. 즉 영화마다 기획개발 과정이 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기획개발에 걸리는 시간도, 드는 비용도, 주도하는 인력도 영화마다 다르다. 평균이란 게 없고 ‘대체적으로’라고 뭉뚱그리기도 어렵다. 기획개발을 보는 관점 역시 투자자, 프로듀서, 감독, 작가에 따라 모두 다르다. 그렇기에 본격적인 기획개발 과정을 소개하기에 앞서 이 글을 쓰는 관점에 대해 먼저 알릴 필요가 있다. 여기서 보여줄 기획개발의 풍경은 영화판에 입문한 지 올해로 10년째지만 아직 변변찮은 프로듀서 크레딧을 박아 넣지 못한, 이른바 ‘명함만 프로듀서’ 위치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직접 ‘내 작품’으로 경험한 것보다는 주위에서 보고 들은 경우가 더 많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좀 더 객관적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편향적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어쩔 수 없이 한국영화산업의 기획개발 과정에 대한 조감도이기보다는 단면도에 가까울 것이다.
영화산업에서 영화 제작이 결정되기 전 단계의 모든 공정을 ‘기획개발 과정’이라고 할 때, 이 과정은 중요한 분기점(의사결정 지점)에 따라 기획-개발-패키징 단계로 세분화할 수 있다. 분기점이란 말이 거창해 보이지만 결국 ‘돈’ 문제다. 비용이 발생하기 전의 모든 단계를 ‘기획’으로 묶고, 첫 번째 비용이 발생하는 순간부터 ‘개발’ 단계로 분류한다. 이를테면 웹툰의 영화화 권리를 구매하거나 작가를 고용해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하면 그건 개발 단계에 진입한 것이다. ‘패키징’은 개발된 시나리오를 바깥에 ‘돌리는’ 단계다. 주연배우 캐스팅, 예산과 제작 일정의 수립 등이 이에 해당되며 이 과정의 마지막 순간에 ‘투자 제작 결정’이 이루어진다.
실무적으로 각 단계는 때때로 중첩된다. 이를테면 프로듀서가 작가를 붙여 시나리오를 개발한 뒤 감독을 섭외하는 경우, 감독 섭외를 패키징 단계로 파악할 수도 있고 개발 단계라고 파악할 수도 있다. 각 공정에 드는 평균적인 소요 시간이나 비용은 통계적으로 추정해볼 수 있으나 이 역시 실무적으로 큰 의미는 없다. 다만 기획에서 패키징의 완성까지 전 과정이 2년 이내에 끝나고 여기까지 든 총 비용이 전체 순 제작비 예산의 5% 미만이면, ‘순조로운 기획개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기획개발은 당연히 순조롭기를 기대하며 시작된다.
기획 | 창의성만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기획은 영화의 모든 공정 중에서 유일하게 혼자서도 할 수 있고 돈도 들지 않는 작업이다. 그만큼 아무나 할 수 있고 그렇기에 그 능력을 쉽게 인정받기 어려운 작업이기도 하다. 영화 기획이라고 하면 ‘관객 취향의 트렌드를 파악하고 예측해 이에 맞춘 영화를 내놓는다’는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지만, 이런 ‘기획영화’는 사실상 개념으로만 존재한다. 여전히 투자 결정을 받는 영화 대부분은 그렇게 기획된다기보다 그냥 제작자나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일단 개발한 뒤 이를 투자자들에게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 ‘기획서’라는 형식을 빌릴 뿐이다.
<설국열차>(봉준호, 2013)나 <도둑들>(최동훈, 2012) 같은 대작은 물론, <숨바꼭질>(허정, 2013)이나 <늑대소년>(조성희, 2012)처럼 대단히 기획적으로 보이는 영화조차 그렇다. 기획영화라는 개념은 기본적으로 ‘타이밍’인데, 기획개발 과정의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 때문에 타이밍을 맞춘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시즌에 맞춰 화제의 인물이 될지 모를 힐러리를 염두에 두고 ‘힐러리의 젊은 시절’에 대한 시나리오 계약을 체결했다는 할리우드라면 트렌드를 노리는 기획을 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4년 앞을 내다보고 하는 기획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저예산 공포영화나 에로영화들이 아주 짧게 3~6개월 앞의 개봉 시기를 노리고 급히 기획되어 개봉되는 경우는 있으나 이런 기획이 성공한 사례는 드물다.
그렇기에 기획 단계에서 실질적으로 요구되는 능력은 트렌드를 파악하는 능력이라기보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현실적 제약 조건 속에 잘 짜 넣을 수 있는 능력이다. 여기서 현실적 제약 조건이란 예산 규모, 시장 규모(타깃 관객층의 규모), 수익 창구의 규모(극장/VOD 등) 등에 의해 결정된다. 쉽게 말하면, 쓸 돈과 들어올 돈 사이의 균형을 최대한 사전에 예측해 맞추는 것이다. 100억 원 이상의 예산이 들어가는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다면 최소 3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할 수 있는 이야기여야 한다.
300만 이상을 움직이려면 주 관객층인 20~30대 남녀 모두를 타깃으로 삼을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20대 미만, 혹은 40대 이상 또는 특정 성별에만 어필할 수 있는 이야기라면 300만을 목표로 하는 게 산술적으로 어려워진다. 흔히 애니메이션, 공포, 19금 멜로물들은 300만을 노리기 역부족인 장르로 여겨진다. 역으로 특정 관객층만이 선호할 이야기를 기획한다면, 그 이야기를 한정된 예산으로 찍을 수 있는지 판단해야 한다. 예컨대 100만 명 정도가 좋아할 이야기를 목표로 한다면, 예산을 30억 원에 맞출 수 있는지 고려해야 한다. 물론 언제나 예외가 존재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두지만, 선례의 힘도 의사결정에서는 무시하지 못하는 요소다.
물론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어떤 관객층을 위한 것인지, 명확히 심지어 객관적으로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이를 위해 고안된 방법 중 하나가 로그라인(한 줄 콘셉트)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 줄, 혹은 한 문장으로 정리하는 것인데, 그 한 문장이 어떠한 문장인지, 그리고 한 문장으로 정리되는 게 얼마나 쉬운지에 따라 타깃 관객층을 대략 예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로그라인은 아무렇게나 한 문장을 쓰는 게 아니라, ‘상황 설정+캐릭터+결말’을 한꺼번에 담아낼 수 있는 한 문장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서로의 정체를 숨기고 한집에서 살게 된(상황 설정) 전직 국정원 요원과 남파 간첩(캐릭터)이 서로를 견제하다가 결국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결론)’는 식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와 같은 로그라인으로 정리할 수 있고 예상되는 비용과 수익(관객) 사이에 균형이 잡히기 시작하면, 이제 개발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판단이 가능해진다.
실제로 투자사의 ‘기획개발 투자’(혹은 소싱) 결정은 원칙적으로 이러한 로그라인과 예상 제작비 및 예상 관객의 균형 여부를 판단 근거로 이루어진다. 물론 이 과정을 생략하고 직접 자신이 비용과 시간을 들여 시나리오를 개발할 수도 있다. 하지만 로그라인이 정리되지 않은 채 개발이 이루어지게 되면, 결국 투자 결정 단계에서 혹은 거기에 이르기 전에 한 번쯤은 ‘이 프로젝트를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가 이루어지거나 프로젝트가 좌초 위기에 처하는 경우가 많다.
개발 | 배를 산으로 보내지 않기 위한 필사의 노력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영화를 기획하는 사람은 없다. 시나리오는 투자 결정을 내리기 위한 준비물이며 배우를 포함한 모든 스태프가 기획에 대해 같은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게 하기 위한 공유수단일 뿐이지, 그 자체로 완결된 상품이 아니다. 그렇기에 시나리오는 되도록 빨리, 싸게 만들 수만 있으면 좋다. 하지만 시나리오가 그렇게 맘대로 안 된다는 게 문제다.
기획자가 손수 시나리오를 쓰지 않는 한, 개발 단계에서부터 공동 작업이 시작된다. 공동 작업은 하나의 시나리오를 몇 명이 쓰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프로듀서가 작가를 고용할 때 작가가 온전히 시나리오를 쓰더라도 이것은 공동 작업이다. 프로듀서가 작가의 작업에 개입하기 때문이다.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쓸 목적으로 투자사로부터 기획개발 투자를 받았더라도 이것은 공동 작업이 된다. 투자사 역시 감독의 작업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공동 작업을 누가 주도하며 어떻게 시너지를 내느냐에 따라 기획개발의 성패가 좌우된다.
기획개발은 언제나 ‘초고 3개월+각색 3개월+패키징 3개월’ 해서 1년 이내에 투자 결정을 받는다는 부푼 꿈을 안고 출발한다. 이 스케줄이 들어맞기 위한 조건은 시나리오를 쓰는 첫 번째 작가가 단번에 완벽한 초고를 뽑아내고 그 작가가 최종 투자 결정고(稿)까지 마무리하는 경우다. 초고가 처음의 기획 방향과 다르거나 예상하는 수준에 올라오지 않았을 때, 그래서 작가가 교체되고 이 과정이 반복되기 시작할 때 개발 과정은 점차 지옥으로 변해간다. 예정된 계획은 무한정 늦춰지면서 작가나 감독은 늘어지는 작업 기간 때문에 다른 작업에 참여할 기회가 박탈되어 소득이 줄어들어 불만을 갖고, 투자사는 투자금을 회수하고자 프로듀서를 압박한다. 프로듀서는 이 기획을 결국 엎어버려야 하는 건지 계속 끌고 나가야 하는 건지 고민에 빠진다. 10편의 작품이 개발을 시작했다면 이 단계에서 3분의 2는 결국 엎어지게 된다.
개발 단계에 참여하는 주체들이 어떻게 합의해나가야 이 ‘개발 지옥’에 빠지지 않고 무사히 투자 결정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지 정답은 없다. 작가나 감독에 대한 무한 신뢰가 해법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프로듀서의 적극적인 개입이 작품을 완성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작가-감독의 성향에 따라 지난번에 통했던 작업 방식이 통하지 않기도 하고 역효과를 일으키기도 한다.
몇 년 전 어느 잡지에 실린 김용화 감독과 박상연 작가의 대담 기사 중에서 공동 작업할 때 ‘신(Scene) 리스트’를 서로 합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방식에 동의하지만 신 리스트를 함께 만드는 것을 작가 고유 영역의 침해라고 여기는 작가도 많아서 이 방법을 실제로 관철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어렵게 합의한 신 리스트가 또 반드시 좋은 결과물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 크레딧과 저작권, 수익 분배 문제 역시 녹록지 않다. 개발 단계에 참여하는 주체들은 개발에 기여한 정도에 따른 자신의 몫을 요구한다. 투자자들은 개발비를 투자한 대가로 제작 지분, 혹은 저작권을 요구한다. 작가나 감독들도 시나리오에 참여한 대가로 본래의 ‘작가료’ 외에 제작 지분을 요구하는 추세가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저작권, 수익 분배를 둘러싼 계약 방식까지 포함하면 개발 과정은 말 그대로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이에 대한 도움을 주기 위해 영화진흥위원회 등에서 표준계약서 등을 제안하기도 하지만 실무에서의 활용도는 아직 낮다.
패키징 & 투자 결정 | 결국 영화는 오너 비즈니스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100%의 시나리오’는 없다. 대부분의 시나리오는 불완전한 상태에서 개발을 멈추고 다음 단계로 진행하기 위한 결정을 받는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이 바로 ‘언제 개발을 멈출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는 다시 말해 ‘캐스팅고’ ‘투자결정고’를 판단하는 능력이다. 개발 중인 시나리오를 섣부르게 ‘캐스팅고’로 판단해 배우들이나 투자자들에게 돌리다가 부정적인 평가를 받으면, 그 시나리오는 더 나아질 수 있었음에도 힘을 잃고 좌초되는 운명에 처한다. 그렇다고 완벽한 시나리오가 나올 때까지 숨겨두고 묵혀두기만 하면 개발 기간은 3년, 5년 한없이 길어진다.
여기서 시나리오의 운명을 책임질, 혹시나 잘못될 경우의 리스크까지 책임질 사람이 필요해진다. 그는 최초의 기획자일 수도 있고 감독일 수도 있고 투자사일 수도 있다. 그게 누구든지 ‘이 시나리오는 여기까지로 충분하다’고 선언하고 확신을 갖고 밀어붙일 사람이 필요하다. 그 사람의 확신이 주변 사람들(특히 투자자들)을 설득시킬 수 있느냐가 시나리오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결정한다. 현재 한국영화산업 내에 존재하는 성공한 프로듀서들은 가장 완벽한 시나리오를 개발해내는 사람들이 아니라, 개발 중인 시나리오를 가장 적절한 시점에 멈추고 다음 단계로 밀어붙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세상에 나온 시나리오가 감독 및 주연배우 캐스팅을 마치고 제작 일정과 예산까지 대략적으로 결정되고 나면 이제 최종적인 투자 결정 대상이 된다. 투자 결정 프로세스는 이론적으로는 심플하다. ‘흥행 예측’만 하면 된다. 이 시나리오와 패키징으로 예상되는 관객 수가 얼마인지 따져보고 이를 제작비와 견주어보아 예상되는 투자 수익률을 계산하면 된다. 하지만 문제는 객관적이고 정확한 흥행 예측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2000년대 중반 영화산업 내 우회상장이 활발하고 금융자본이 영화산업 투자를 적극적으로 검토하던 무렵, 객관적인 흥행 예측 방법론의 개발에 대한 많은 관심과 시도가 있었다.
CJ가 시나리오 모니터링 시스템을 개발해 투자 결정에 활용하면서 다른 투자배급사에 확산됐고, 영화진흥위원회에서는 새롭게 시장에 진입하는 금융권을 돕기 위해 시나리오 가치평가 방법론에 대한 연구를 지원했다. 몇 년간 이런저런 시도가 있었지만 아직까지 신뢰도를 갖춘 예측방법론은 개발되지 못했다. 그러면서 객관적 예측에 대한 회의론이 등장했다. ‘객관적 흥행 예측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 힘을 얻으면서 투자배급사의 시나리오 모니터링은 축소되거나 중단됐고, 영진위 역시 연구를 위한 예산을 배정하지 않게 되었다.
객관적 흥행 예측의 가능성을 포기하면 투자자들의 주관적인 투자 경험과 흥행에 대한 감(촉)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항상 ‘이번 예측은 틀릴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최종적인 의사결정은 그 의사결정에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의 ‘확신’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 영화를 결국 ‘오너 비즈니스(Owner Business)’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기획개발, 패키징, 투자 결정 단계에서 수많은 사람이 각자 의견을 낸다고 해도 결국 이 영화를 책임질 한 사람, 즉 오너가 없다면 이 영화는 결코 제작되지 못한다.
과거 경험을 통해 나아지는 일은 정녕 불가능한가?
한국영화의 기획개발 과정은 케이스마다 다르다. 이는 사실 기획개발 과정이 여전히 거대한 혼돈 속에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오늘의 성공이 내일의 성공을 담보해주지 못한다’는 기획개발의 진리는 결국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나아질 수 있음을 담보해주지 못한다’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학습이 불가능하다는 걸 인정하는 순간, 한국영화의 기획개발 역량은 이미 성공을 거두고 있는 몇몇 ‘오너’가 계속 성공하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게 된다. 탁월한 소수에게 산업 전체를 맡길 수밖에 없다는 것은 산업 전체로는 언제나 불안 요소가 된다.
by.
최수영(영화기획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