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븍록버스터]블록버스터에 관한 6가지 잡담 04. 악당
블록버스터의 주인공에게 필수적인 조건이 있다면, 두려움이다. 상어를, 공룡을, 바다를 향한 두려움을 관객에게 전염시킨 뒤,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 스펙터클과 카타르시스를 첨가하는 것은 <죠스>(스티븐 스필버그, 1975)와 <쥬라기 공원>(스티븐 스필버그, 1993), <타이타닉>(제임스 캐머런, 1997)의 작법에 대한 가장 짧은 요약이다. 무엇을 이겨내야 하는지의 문제는 비교적 명료한 내러티브를 갖는 블록버스터에서 사실상 주인공에게 주어진 미션의 거의 대부분이며, 그래서 때로는 공포의 대상이 영화의 실질적인 중심 캐릭터로 기능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주인공의 신념과 투지는 위협에 의해 발현될 뿐 아니라 그 방향마저 위협의 내용에 영향을 받는다. 굳이 철학적인 논의로 접어들지 않더라도, 블록버스터의 세계에서 악당이 주인공의 그림자로 해석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두려움과 혼돈 가운데 선 어둠
그러한 악당 본연의 임무에 가장 충실한 캐릭터라면 단연 <다크 나이트>(크리스토퍼 놀란, 2008)의 조커를 꼽을 수 있겠다. 오프닝 시퀀스를 장악하며 영화의 메시지가 규명과 해결이 아닌 혼돈에 있음을 공표한 그는 전작이 구축해놓은 영웅으로서의 배트맨을 의심하고 농락한다.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는 악당이 바라는 것은 오직 질서를 붕괴하는 것뿐이고, 악당의 탐욕이 불분명해질수록 영웅의 명분 또한 불투명해진다. 물리적인 힘이나 물량 공세의 측면에서도 결코 월등하다고 할 수 없건만, 조커는 상식을 부정하고 예측을 불허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블록버스터와 전혀 다른 부피의 긴장을 만들어낸다. 용기를 내고, 최선을 다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 되고, 악당을 이해하기 위해 영웅은 그야말로 ‘어둠’의 혼돈 속으로 투신해야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조커가 자아내는 공포는 패배가 아니라 실패조차 알아차릴 수 없는 불감의 상황에 대한 경계였다. 심지어 배트맨과 조커가 뒤엉켜 싸울 때, 배에 탄 시민들이 폭탄 버튼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하는 장면은 생존의 성취를 영웅으로부터 박탈함으로써 블록버스터 최초로 영웅과 관객의 두려움을 분리하는 순간이었다.
오히려 영화는 이야기가 끝나는 시점에서야 관객이 임무 속에 갇혀버린 배트맨의 두려움을 이해하고 공유하게 만들었다. 손에 땀을 쥐고 영화를 보고 나면,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게다가 2008년 1월,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던 배우 히스레저의 사망으로 조커는 이후로도 존재에 대한 설명을 더할 기회를 잃었다. 그야말로 영원한 혼돈, 해소되지 않은 공포, 불후의 악당으로 남겨진 것이다.
by.윤희성(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