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버스터] 블록버스터 시대의 할리우드 : 차별화의 경제학
블록버스터란 용어는 엄밀하게 다듬어진 개념이 아니라 저널리즘에서 특정한 현상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한 용어다. 1975년 스티븐 스필버그의 <죠스>가 그 당시까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흥행수입 1억 달러의 벽(block)’을 돌파하면서부터 비로소 블록버스터란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엄청난 흥행 성적을 거둔 작품에 대한 경이감을 표현하던 이 용어는 이후 일종의 마케팅 용어로 전유된다.
<죠스>나 <스타워즈>와 같은 작품들의 흥행 성적을 꿈꾸던 제작사들이 자사가 만든 영화가 그런 작품들과 비슷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고 홍보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블록버스터란 용어는 영화계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블록버스터란 개념을 명확하게 규정짓기는 쉽지 않다. 흔히 기존의 다른 영화들을 압도하는 제작비, 스펙터클, 특수효과 혹은 수익 등을 보통 블록버스터의 필요조건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이는 결국 상대적인 개념일 뿐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결국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새롭게 등장하는 더 크고 더 화려한 영화들에 의해 극복되고 대체될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블록버스터란 같은 시기에 제작, 상영되는 다른 영화와 상대적으로 차별되는 요소(특히 규모에 관한)를 가진 영화들이며, 이를 홍보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영화라고 정의하는 편이 한결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때 블록버스터 영화가 추구하는 차별화란 미학적 차별화가 아니라 산업적(제작비의 규모, 배급의 방식들), 기술적(새로운 특수효과 등) 차별화를 말한다. 블록버스터 영화란 결국 영화 산업의 욕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차별화에 의해 추동되는 영화로 볼 수 있다.
고전적 영화 제작 시스템의 몰락과 ‘블록버스터’의 등장
초기 영화에서부터 블록버스터라고 불릴 만한 초대형 작품들이 있었음에도 1970년대에 들어서야 블록버스터란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물론 블록버스터의 어원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사용되었던 폭탄의 이름이었기 때문에 이후에 등장한 영화들에 그러한 명칭이 붙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블록버스터란 용어가 등장한 1970년대가 고전적 스튜디오 시스템의 붕괴 이후 뉴 할리우드라고 하는 새로운 영화 산업의 질서가 생성되는 시점이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리우드의 고전적 스튜디오 시스템은 제작-배급-상영으로 이어지는 수직적 통합을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산업적인 안정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러한 안정성을 바탕으로 고전적 할리우드 스타일이라는 꽃을 피울 수 있었다. 하지만 대법원의 반독점 판결이라는 법적인 제재와 TV로 대표되는 강력한 경쟁 매체의 등장은 할리우드 영화 산업이 더 이상의 안정성을 누릴 수 없도록 만들었다. 위기에 봉착한 할리우드가 찾아낸 첫 번째 탈출구가 뉴아메리칸 시네마라는 미학적 시도였다면, 두 번째 출구가 바로 블록버스터 영화라는 산업적인 시도였다. 이 두 번의 시도는 결국 할리우드 영화가 강력한 경쟁 매체인 TV에 대항하는 비교 경쟁력 확보의 방안이었다고 볼 수 있다. 수직적 통합의 붕괴로 안정적인 제작과 수익 창출의 구조를 잃게 된 할리우드는 이른바 패키지 딜(프리랜서인 영화 스태프와 배우들을 개별 프로젝트별로 계약하는 방식)이라는 방법을 통해 고정비용(직원들의 주급이나 장비와 촬영 스튜디오의 유지비용 등)을 최소화하면서 개별 프로젝트에 유동성을 집중시키는 방법을 채택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인해 안정적인 제작편수 확보라는 고전적 스튜디오 시스템을 유지하는 전략을 포기하고 대신에 선택과 집중이라는 새로운 전략을 선택한다. 다시 말해서 몇 편을 만드느냐가 아니라 편수에 상관없이 시장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느냐가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또한 집에서 편안하게 돈을 내지 않고 볼 수 있는 TV라는 경쟁 매체의 등장은 영화가 더는 과거의 형태에 안주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영화 산업의 입장에서 TV 드라마와의 차별성은 선택의 문제라기보다는 생존의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산업 구조의 재편 과정, 타 매체와의 경쟁 과정에서 나타난 차별화의 욕망은 결국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근본적인 생존 욕망의 반영일 수밖에 없다.
‘영화’에 의한 ‘영화’를 위한 장르를 구축하다
초기 블록버스터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1977)는 탁월한 차별화 전략을 구사했다는 점에서도 원형적인 블록버스터라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이 취한 가장 두드러진 차별화 전략은 새로운 시청각적 경험을 제공하는 테크놀로지에 집중한 것이다. 스타워즈는 다양한 미니어처와 특수효과를 효과적으로 사용했으며, 조지 루카스가 직접 개발한 THX라는 새로운 사운드 시스템을 적용해 과거의 영화와는 차별되는 시청각적 경험을 제공했다. TV의 작은 화면이 주는 것과 다른 시청각적 경험은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 모으는 확실한 유인 요소로 작용했고, 이후의 블록버스터들이 그대로 따르는 공식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새로운 마케팅 전략으로 이어진다. 과거 할리우드의 대작이 작품에 출연한 스타를 중심으로 하는 스타 마케팅을 주로 채택했던 데 비해서 <스타워즈>는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스펙터클 마케팅 전략을 선택했다. 또한 기존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하는 관행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위한 소설을 먼저 출판하고, 그것을 영화의 마케팅과 직접 연결시키는 새로운 전략을 구사하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긴 기간 영화에 대한 정보를 노출함으로써 영화에 대한 기대를 높이는 전략 역시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것이었으며, 현대 영화 마케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노출 빈도의 증가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또한 <스타워즈>는 이후 원 소스 멀티 유즈(OSMU)라고 하는 방식들을 선구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원작 소설이 영화로 이어지고, 영화의 성공은 다양한 캐릭터 상품과 게임으로 이어졌다. 이는 영화가 단순히 영화 그 자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산업으로 이어지는 파급력을 가지고 있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는 블록버스터 영화가 미디어 그룹들이 이끄는 다국적 문화산업의 핵심적인 동력원이 되는 현재의 상황을 미리 보여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렇듯 블록버스터 영화는 산업구조의 조정기와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차별화 전략에 따른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영화 산업의 생존과 블록버스터의 발전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서 미디어 환경은 하루가 다르게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그에 따라 영화의 위상 역시 현저하게 변화하고 있다. 모바일 기기의 등장과 발전으로 인해 현재의 영화는 TV의 등장 시대와 마찬가지의 위기를 겪고 있다. TV가 영화만이 보여주던 움직이는 이미지를 가정 속으로 끌고 들어왔다면, 모바일 기기 등은 움직이는 이미지를 개별 관객들의 몸에 부착할 수 있게 만들었다. 영화는 이제 무료, 혹은 초저가로 제공되고 휴대용 장치들을 통해 개인들의 생활과 밀접하게 결합된 동영상과 경쟁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의 것과는 다르게’라는 모토를 내세우는 블록버스터들은 여전히 영화 산업의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선택인 것처럼 보인다.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마케팅 기법을 도입할 것이고, 이를 통해 영화 관람을 또 다른 차원의 시청각적 경험으로 만들 것이다. 블록버스터 영화가 추구하는 차별화의 경제학은 결국 영화 산업이 선택한 생존의 수단이다.
by.김병철(동의대 영화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