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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아스트]영미권에서중남미 영화까지,세계 영화계는 지금
세계 3대 영화제인 칸, 베니스, 베를린에 소개되는 영화들은 그해 세계 영화계의 큰 흐름을 대변한다. 거장 및 중견 감독들의 신작이 가장 먼저 공개되는 장이 바로 이 세 영화제이기 때문이며, 재능 있는 신인들 또한 특정 어워드를 통해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새로운 세대나 경향의 출현을 알리기 때문이다. 그중 칸과 베를린에는 마켓이 있어서, 비단 영화제 공식 출품작이 아니라도 타 주요 영화제에 소개되었거나 소개될 예정인 작품들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통해 가까운 미래의 판도 또한 점칠 수 있다.
중남미 영화의 눈부신 성장
이런 측면에서 아시아권을 논외로 한다면, 최근 5년간 세계 영화계의 판도를 이야기할 때 중남미 영화의 두드러진 성장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2010년 칸 영화제는 영화 종사자 다수가 이러한 조짐을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중남미 지역에서 제작된 영화들이 칸 주요 부문에 대거 소개되고 수상함으로써 그동안 축적돼온 이 지역 영화산업의 잠재력이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그 시점에서부터 2년 반 정도가 흐른 지금, 여전히 콜롬비아, 칠레 등을 중심으로 중남미 영화의 미래를 짊어질 신인들이 세계 무대에 소개되고 있다. 이런 젊은 작가들의 등장이 유의미한 것은 장기적 관점에서 이들이 향후 세계 영화의 지형도를 변화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10년은 중남미 영화에 대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해이자, 유럽 입장에서 보면 영화산업에 암운을 드리우게 될 ‘유로존 위기’가 그리스에서부터 불거져 나온 해이기도 하다. EU 각국 정부의 문화 예산 삭감은 영화 지원 삭감으로 이어지면서 2013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회원국의 영화산업을 위축시키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최근 2~3년 동안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폴란드 같은 전통 강국을 제외하면, PIIGS(포루투갈・이탈리아・아일랜드・그리스・스페인등 유럽 5개국)국가들 중에는 포르투갈처럼 베를린 마켓에서 부스를 아예 철수하거나, 그리스처럼 자국 영화의 해외 진출 지원을 중단해야만 하는 안타까운 사례들이 있다. 재정적 암운은 세계적인 거장들에게는 미미한 영향밖에 끼칠 수 없지만, 독립영화계나 무명의 신인들에게는 제작뿐 아니라 전방위에서 부정적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아이러니하게도 유로존에 속하지 않은 중남미의 경우 2010년을 전후해 국가 차원의 영화 지원이 각국 영화진흥위원회를 중심으로 대폭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2~3년 전부터 유럽 영화계가 재정적 위협을 받고 있다면, 이 지역 영화는 그와 정반대의 상승 일로를 달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최근 세계 영화계의 지형도를 거칠게 요약해보자면, 항상 주목받는 거장들은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신작을 세계 무대에 꾸준히 내놓는 반면, 실험성과 도전성을 대변하는 신인들은 주로 중남미와 서유럽 외 지역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아프리카는 영화 제작 환경이 기본적으로 열악하기에 특수한 경우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거장과 중견작가들
현재 거장들의 명단을 알고 싶다면 칸, 베니스, 베를린의 경쟁 부문이나 비경쟁 부문, 다음으로 타 공식 부문을 살피면 된다. 2009년과 2012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오스트리아 감독 미하엘 하네케나, 2011년 <파우스트>로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러시아의 알렉산더 소쿠로프, 2012년 베를린 황금곰상에 빛나는 이탈리아의 타비아니 형제(<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이미 영화사에 이름을 새긴 이들이다. 마찬가지로 칸의 단골 게스트인 영국의 켄 로치나 미국의 테렌스 말릭과 우디 앨런, 캐나다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등은 영미권을 논할 때 가장 먼저 주목받는 감독들에 속한다. 그 외, 프랑스, 벨기에, 스페인 등에서도 매해 사전 제작 단계에서부터 해외 세일즈사가 붙는 거장들이 즐비하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허샤오시엔 같은 아시아 거장들도 마찬가지다. 유럽과 북미를 중심으로 한 공인된 거장들의 신작이 매년 세계 3대 영화제 공식 부문, 특히 경쟁 부문에 소개되는 것은 여러모로 당연하다. 그것은 꼭 높은 작품성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그들 영화의 수준이 우리의 기본적인 기대치를 만족시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들 거장과 함께 영화사를 움직여가는 중견 작가들도 매년 영화계를 뜨겁게 달군다. 그들은 영화사의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붙기에는 상대적으로 젊지만 향후 영화계의 세대 전환을 예고하는, 혹은 이미 실행하는 이들이다. 대개 서너 번 이상 세계 3대 영화제에 소개되면서 실력을 인정받은 경우이며, 거장들과 어깨를 맞대고 주요 경쟁 부문에 소개되는 영광을 이어가는 차세대 거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2007년 칸 황금종려상의 주인공인 루마니아의 크리스티안 문쥬는 그중 하나다. 그는 젊은 나이에 두 번째 장편(<4개월, 3주 그리고 2일>)으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함으로써 대번에 세계적인 작가로 부상한 후, 2012년 다섯 번째 장편 <신의 소녀들>로 다시 한 번 칸에서 시나리오상 및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동구권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입지를 굳혔다.
카를로스 레이가다스 또한 화려한 데뷔 후 현재 가장 눈부신 행보를 보이는 작가 중 하나다. 2002년 칸 감독주간에 소개된 첫 장편 <일본>이 황금카메라상 특별언급을 받은 후 2007년 세 번째 장편 <침묵의 빛>으로 칸 심사위원상을, 2012년 다섯 번째 장편 <포스트 테네브라스 룩스>로 칸 감독상을 수상하며 차곡차곡 경력을 쌓아가는 그를 멕시코 차세대 거장으로 손꼽는 데 반대할 이는 없을 것이다. 1999년 첫 장편 <크레인 월드>로 베니스에 입성한 후<사자굴>(2008)로 칸 경쟁 부문에 진출한 파블로 트라페로는 아르헨티나 뉴 웨이브를 선도한 작가로 자리 잡았고, 마테오 가로네는 <고모라>(2009)와<리얼리티>(2012)로 이미 칸 심사위원대상을 두 번 수상하며 난니 모레티의 뒤를 이을 이탈리아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독일 영화의 미래를 책임질 안드레아 드레센(2011 주목할만한 시선 대상)과 울리히 쾰러(2011 베를린 감독상), 그리스의 요르고스 란티모스(2009 주목할만한 시선 대상, 2011 베니스 시나리오상), 그 외 프랑스의 카트린 브레야, 프랑수아 오종, 알제리의 라쉬드 부샤렙 등 자국 영화의 미래를 짊어질 뛰어난 작가들을 일일이 열거하기에는 지면이 모자르다. 그렇다면 최근 몇 년간 회자되는 중남미 영화의 강세는 과연 어떤 양상을 띠는 것일까?
중남미 신인들의 비약적 성장
앞서 언급한 대로, 중남미 지역 영화에 대한 관심은 2010년 칸에서부터 증폭된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2010년 칸 경쟁 부문을 제외한 타 섹션의 주요 수상작 리스트를 보면서 중남미 영화의 약진을 이야기한 이가 꽤 많다. 이해는 태국의 기대주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엉클 분미>로 황금종려상을, 한국의 세계적인 작가 이창동의 <시>가 시나리오상을 탄 해이기도 하며, 홍상수의 <하하하>가 주목할만한 시선 대상을 거머쥐며 아시아 영화의 저력을 드러낸 해이기도 하다. 경쟁 부문에서 중남미를 대표한 작품은 하비에르 바르뎀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비우티풀> 단 한 편이었다. 중남미에 대한 관심은 이미 차세대 거장으로 거론되는 이 멕시코 중견 작가의 신작보다는 오히려 주목할만한 시선과 황금카메라상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해 주목할만한 시선에서 페루 출신 베가 형제의 첫 장편 <10월>이 심사위원상을, 아르헨티나의 산티아고 로자, 이반 푼드 공동연출의 <입술>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멕시코의 마이클 로웨의 <리프 이어>가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하면서 당시 영화인들 사이에서 중남미 영화의 범상치 않은 움직임에 대한 이야기가 퍼져나갔다. 특히 <10월>과 <리프 이어>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과 힘을 예고하는 첫 장편이어서 더욱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입술> 또한 이반 푼드에게는 첫 장편이었다) 칸 영화제만을 두고 중남미 영화가 새로이 강세 주기로 진입했다고 보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말할 이들도 있겠지만, 어쨌든 칸이 세계 영화 판도의 변화를 가장 떠들썩하게 들춰내고 이끄는 장이 되는 것은 사실이기에, 한 해에 세 작품, 그것도 신인들의 영화가 그곳에서 수상한 사실은 어떤 변화를 감지하는 바로미터가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게다가 이런 2010년의 상황은 2003년 이래 7년간 칸 영화제 공식부문 수상작 리스트에서 중남미 영화의 비중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 지역 영화의 역동성은 이듬해인 2011년 칸 비평가 주간에 소개된 아르헨티나의 첫 장편 <아카시아>(파블로 지오르젤리)가 황금카메라상을 비롯해 다수 상을 수상하고, 1년 후인 2012년 멕시코의 미셸 프랑코가 두 번째 장편 <애프터 루시아>로 젊은 나이에 주목할만한 시선 대상의 영예를 안으며 더욱 확실한 근거를 얻게 되었다. 오직 첫 번째 혹은 두 번째 장편만을 소개하는 칸 비평가 주간의 2012년 대상이 칠레 출신 감독의 <이곳, 그곳>에 수여된 점도 짚고 넘어갈 일이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가 2000년 첫 장편 <아모스 페로스>로 비평가 주간 대상 외 유수 영화제에서 여러 번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한 이래 칸 경쟁 부문에서 중남미를 대표하는 작가로 발돋움한 것을 생각해볼 때, 그리고 역대 황금카메라상 수상 감독들(존 터투로, 짐 자무시, 바흐만 고바디, 자파르 파나히,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 등)이 마찬가지로 차세대 거장의 길을 걷고 있음을 감안할 때, 이런 중남미 신인들의 등장은 눈여겨볼 가치가 충분하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갈 점은 2010년에 표면화된 중남미의 강세가 사실 그전에 베를린에서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되었다는 것이다. 의미심장하게도 2008년, 2009년 황금곰상은 모두 중남미 출신의 신인에게 돌아간 바 있다. 브라질의 신예 호세 파디야의 첫 장편 <엘리트 스쿼드>(2008)와 페루 출신의 클라우디아 로사의 두 번째 장편 <밀크 오브 소로우>(2009)가 당시 베를린 최고의 영예를 얻은 주인공들이다. 게다가 동일한 시기에 베를린의 다른 주요 상 또한 중남미 신인들에 수여되었다. 2007년 심사위원대상과 남우주연상은 아르헨티나의 아리엘 로터가 연출한 두 번째 장편 <타인>이 수상했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것으로 평가되는 작품에 수여되는 주요 상인 알프레드바우어상도 2008년, 2009년 연이어 중남미 신인에게 돌아가면서 이 지역의 새로운 가능성을 증명했다. 특히 2009년 알프레드바우어상을 수상한 우루과이 감독 아드리안 비니에즈의 첫 장편 <지간테>는 그해 베를린 심사위원 대상과 첫 장편영화상도 수상하면서 3관왕의 영예를 얻은 바 있다. 비니에즈는 귀추가 주목되는 중남미 신인 중 한 명일 것이다.
중남미 영화, 베를린에서 칸으로
그런데 2010년부터 상황은 급변한다. 칸과는 반대로 2012년까지 베를린 주요 수상작 리스트에서 중남미 영화의 비중이 갑자기 줄어드는 것이다. 1990년대를 유럽과 아시아 영화에, 2000년대를 미국 영화에 크게 할애하며 중남미와 다소 거리를 두어온 베니스를 논외로 하자면, 2008~2012년에 관찰되는 베를린과 칸의 변화가 시사하는 점은 분명하다. 대다수 감독들은 자신들의 영화를 출품할 때 세계 부동의 명성을 자랑하는 칸을 우선시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베를린에서 포착된 중남미 신인들의 가능성을 칸이 뒤늦게 인식해 라인업에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지나치게 단순화한 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2008년부터 베를린에서 뚜렷하게 부각된 중남미 신인들의 강세가 2010년부터 칸으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으로 세계적인 매스컴을 타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칸이 수여하는 가장 영예로운 상 중 하나로, 공식/비공식 섹션을 불문하고 첫 장편에 수여되는 황금카메라상이 2010년, 2011년 연거푸 중남미 감독에게 수여된 사실은, 2008년, 2009년 베를린 최고상인 황금곰상이 연거푸 중남미 신인들에게 수여되며 매스컴을 타기 시작한 이 지역의 강세를 그대로 이어가는 동시에 전 세계에 더욱 강렬하게 각인시킨 것이다.
중남미 전통 영화 강국인 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가 꾸준한 저력을 보인다면, 콜롬비아나 칠레, 우루과이, 페루 등 타 국가들의 성장도 최근 눈에 띄는 경향이다. 특히 2012년 칸에만 주목할만한 시선, 감독 주간, 비평가 주간 등에 골고루 작품을 포진시킨 콜롬비아와 칠레의 약진이 가장 두드러진다. 칠레는 특별히 2012년 로테르담 영화제 타이거상 또한 수상하며 그해 눈부신 성과를 보여준 중남미 국가로 회자되었다. 이 두 국가는 2~3년 전부터 이 지역에서 가장 돋보이는 영화 지원 정책을 실시하는 국가들이기에, 내실 있는 자국 영화 지원이 단기적으로는 양적 성장을, 장기적으로는 질적 성장을 이끈다는 것을 직접 보여준 예이기도 하다.
올해 베를린 영화제는 예년에 이어 포럼과 파노라마, 제너레이션 부문 등에서 중남미 지역의 예술적 성장을 증명했다. 그리고 이런 중남미 영화의 힘은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예측된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유럽 경제위기의 시발점인 그리스를 중심으로 사회적 인식이 돋보이는 작품이 속속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고 보니 유로존 위기가 터져 나온 지도 벌써 근 3년이 지났다. 향후 몇 년간은 자국 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영화적 성찰이 유럽 영화의 새로운 동력으로 작용하며 중남미 신인들의 강세와 짝을 이루어나갈지도 모르겠다.
by.
이수원(BIFF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