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천국> 제작진은 이두용 감독의 지인과 후배 영화평론가들에게 그에 대한 글을청탁하기에 앞서, 이두용 감독 자신이 생각하는 그의 영화인생을 들어보기로 했다. 영화 일로 현재 미국에 체류 중인 이두용 감독에게 원고를 청탁했고, 그는 ‘유별날 것 없는 인생’이라며 수차례 거절하다 결국 요청에 못 이겨 이메일로 나마 그의 영화 인생을 들려주었다. 그가 보내준 원고 중 초반부 내용을 발췌해 정리했다.
할리우드 키드, 영화 거장에게 홀리다
이두용 감독의 영화인생은 그의 출생지인 서울 청파동 근처 공원과 학교운동장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그는 <검사와 여선생> <이수일과 심순애> 등 주말이면설치되는 가설극장의 은막에서 펼쳐지는 흑백 무성영화에 혼을 빼앗겼다고 한다. 어린 이두용 감독에게 영화 자체가 그저 신기한 볼거리였지만 사실 영화보다 배우의 목소리뿐 아니라 기차 경적 등 온갖 효과음을 내는 변사를 더 재미있게 봤고, 영화를 보며 웃고 우는 어른들의 반응을 보며 덩달아 웃고 울었다고 한다. 이후 중학생이 되니 같은 반에 그와 같이 영화에 홀린 학생이 많았다. 그리고친구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친구 서넛과 함께 틈만 나면남영동 극장까지 진출해 소위 ‘영화 마니아’가 되어 닥치는 대로 영화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각 학교의 훈육주임들이 시내 극장가로 나와 ‘연소자 관람불가’ 영화관에 몰래 입장하는 학생들을 단속했지만 이두용 감독과 그의 친구들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 절묘하게 숨어들어갔고, 때론 잡히기도 하면서 개봉영화를 빠짐없이 봤더랬다. 그러다보니 ‘연소자 관람불가’ 영화를 많이상영했던 국도극장보다는 ‘청소년 관람가’의 컬러 영화가 시작된 스카라극장을선호하는 등 나름대로 영화 선별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보물섬> 같은 탐험영화부터 <원탁의 기사> 같은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한 영화까지, 주로 활극영화를 좋아하게 되었다. 어찌나 활극영화를 좋아했던지, 영화를 보는 도중 화면에 여주인공이 등장하면 같이 보던 친구에게 “야 김빠지게 여자가 왜 나오냐? 지나가면 나 좀 찔러줘!”라며 딴짓을 할 정도였다고 회고한다. 그렇게 남자들이 주로 등장하는 활극영화에만 관심을 보이며 ‘여자를 멀리하던’ 이두용 감독이 여배우 에게 시선을 주게 된 결정적 계기는 <녹원의천사> 여주인공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보면서부터다. 그녀가 승마복을 입고 말에 오르는 장면이 있었는데 어린 그녀의 미모가 얼마나 빼어났는지 극장에 꽉 찬 1000여 명의 중학생의 입에서 동시에 튀어나온 탄성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그 탄성과 함께 이두용 감독의 사춘기도 시작되었다. 당시 친구들은 이렇듯 영화보다는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에게 관심이 많았지만 그는 배우보다 역사를 현실 같이 재현한 영화가 가진 힘 자체에 압도당했다. ‘대체 저런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막연한 경외심을 가지면서 히치콕, 존 포드 등점차 그의 뇌리엔 감독들의 이름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렇게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영화는 감독의 창작물임을 깨닫고 이때부터 이두용 감독은 이들처럼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갖게 된다.
쓰라린 경험 뒤 더욱 단단해진 열혈 영화청년
그러던 중 고등학교 진학 후 대학생 선배가 연출부 세컨드로 있는 촬영장에 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실제’ 영화 세계에 발을 디디게 된다. 바쁘게 돌아가는 영화현장에서 선배는 그를 보고 대뜸 기록판을 내밀며 불러주는 대로 적으라고 했다. 얼떨결에 기록장과 스톱워치를 받은 이두용 감독은 현장에서 기록원 대타로 촬영에 참여하게 된다. 그는 그 작품을 이강천 감독의 <생명>(1958)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영화 촬영팀에 합류하게 된 이두용 감독은 호기심 반, 재미 반으로 선배가 불러주는 대로 기록장을 메워나갔는데 당시 스크립터는 으레 여성들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던 그는 시쳇말로 ‘쪽팔렸지만’ 이것이 기회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성실히 맡은 일을 했고 그것이 소문나 다른 팀에서도 같은 일을 제안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연출부 일을 시작하고 대학 진학을 다음 해로 미루면서그가 일반 대학에 진학할 것이라 믿고 있던 그의 가족들은 발칵 뒤집혔다. 그 후그는 6년간 집에 들어가지 못했고 영화 현장에서 연출 공부를 하며 감독의 꿈을 키웠다.
그렇게 영화를 배워나가던 중 이두용 감독은 세종로의 옛 국회의사당 자리에 있던 시민회관에서 열린 ‘일본영화 특선 10편’을 보게 된다.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과 공식적인 문화교류가 없어 일본영화를 볼 기회가 전혀 없었는데 광복 후 처음으로 <라쇼몽>(구로사와 아키라, 1950) 등 일본의 대표작품들을 국내에서 상영한 것이다. 일본영화는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서구영화와는 또 다른, 짙은 동양적 컬러가 스크린에 투영되면서 뿜어내는 힘에 놀랐던 것이다. 이후 그는 우연한 기회에 홍콩영화도 한 편 보게 되었는데 호금전 감독의 <방랑의 결투>(1965)였다. 이 영화 역시 과장이 심한 중국영화답게 장풍으로 사람들을 쓰러뜨리는장면이 대부분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중국 특유의 기질이 잘 드러나 좋았다고한다. (이두용 감독은 그 후에 쏟아져 나온 중국영화들은 시끄럽고, 잔인해 별로선호하지 않았는데 후에 하와이 영화제에서 첸 카이거가 감독을 맡고 장이모 감독이 촬영한 <황무지>를 보고 무척 인상 깊었다고 회고했다.) 그렇게 여기저기서 연출조수를 하면서 감독을 꿈꾸던 중 이두용 감독은 직접 영화를 만들어보기로 작정하고 어머니와 친척들에게 구걸하다시피 자금을 마련해 당시 충무로의 유명한 흥행사에게 제작비를 맡기고 전국 장사와 개봉관도 잡아줄 것을 약속받은 후 각본을 하나 사서 제작에 착수했다. 제목은 <어느 여승의 고백>이었고, 주연배우로는 김석훈과 박주현을 낙점했다. 하지만 영화 제작의 메커니즘을 전혀 모르고 있던 이두용 감독이 진행을 잘할 리 없었다. 더불어 촬영이 완성되기도 전에 흥행사가개인 빚더미에 몰려 행방을 감추는 바람에 중단되었다. 그 충격으로 이두용 감독은 한동안집 밖을 나오지 않고 은둔자 같은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차라리 잘됐다! 내가 제대로 된 감독이 되기 위해선 망했어야지, 그 영화가 완성돼 극장에서 개봉됐다면, 평생 연출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영화를 만드는 불행한 감독이 됐을 것 아니냐!’는 ‘신통한’ 생각을했고, ‛영화를 다시 배우자! 그리고 능력을 쌓아 남이 인정해줄 때 다시 감독을 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제대로 배울 수 있는 연출자를 찾던 중 지인으로부터 일본에서 조감독한 뒤 신필름에서 감독으로 데뷔하기 위해 귀국한 김수동 감독을 소개받아그의 조감독으로 <여왕벌>(1967) <단발머리>(1967) 등을 작업했다. 이어서 그는 방송 연출을 하다 영화감독으로 전환해 <미워도 다시 한번>(1968)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정소영 감독의 <속 미워도 다시 한번>(1969) <잊혀진 여인>(1969) 등의 조감독을 맡았다. 그렇게 조연출에 몰입하던 그에게 주위에서 슬슬 감독으로 데뷔해도 되겠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정소영 감독 회사에서 제작부장으로 같이 일하던 방규식이자신이 제작을 하겠으니 그에게감독을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이두용 감독은 당시 쓰라린 실패의 경험을 갖고있었기 때문에 선뜻 결정하지 못했지만, 이미 김수현 작가에게 각본을 의뢰해놓고 재차 권유하는 바람에, 그동안 사귀던 연인과 결혼한 그해 1969년 멜로드라마 <잃어버린 면사포>를 만들고 정식으로 감독 데뷔를 한다.
충무로 기대주의 한국형 태권액션 도전기
<잃어버린 면사포>는 김수현 각본, 신성일・문희가 주연을 맡은 작품이다. 당시 큰 히트를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영화의 형식과 만듦새가 좋다는 평을 들었고,이후 지속적으로 연출 제의가 들어와 <댁의 아빠도 이렇읍니까>(1971)<죄 많은여인>(1971) <어느 부부>(1971) 등의 작품을 내놓았으나 어쩐지 그의 마음은 후련하지 않았다. 그는 오래전부터 변화무쌍하고 에너지가 충만한 영화를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기 이두용 감독에게 감독 제의가 들어온영화는 하나같이 당시 유행하는 신파조의 멜로드라마뿐이었다. 틈틈이 <날벼락>(1971) 같은 코믹액션물이나 <야오귀>(1971) 같은 공포영화를 만들기도 했지만 여전히 그는 자신이 만들고 싶은 작품에 배가 고팠다고 한다. 그렇게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 활동을 해왔지만 항상 뭔가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고, 그 부족함은 그에게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짐을 의미했다. 하지만 당시 제작 환경은무척 열악했기 때문에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충분한 자본과 기술을 투입할 여력이 없었다. 그런 여건에서도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감독 몇 명이 훌륭한 영화를만들긴 했지만그것은 충무로 안에서의 성공, 다시 말해 우리끼리의 성공이었다. 부족한 예산과 낙후된 기술은 영화가 시청각 예술임을 부정하고 그 소임을다하지 못한 채 관객에게 오직 이야기와 짜임새만 보고 감동을 느끼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때부터 이두용 감독은 세계로 눈을 돌려야 한국영화가 산다는것을 깨달았다. 그 후 틈틈이 세계 영화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영화가 어떤 것일까 생각하다가 그것은 만국 공통으로 통할 수 있는 액션영화라고 스스로 답을내리게 된다. 당시 홍콩 무술영화가 한국 영화시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해외를 다니면서 세계인들이 코리아라는 국명은 낯설어하면서도 태권도에는 열광하는 점을 착안, 태권도를 통째로 응용해 영화를 만들어보기로 결심했다. 그는 합동영화사의 곽정환 사장(현 서울극장 회장)에게 이러한 영화를 제안했고 곧 의기투합해 한국형 액션영화를 만들되 홍콩이나 서구영화계에서는 만들 수도, 넘볼 수도 없는, 권(손)이 아니라 족(발)을 쓰는 액션영화를 만들기로 결정한다.우선, 그들은 잡지에 공고해 태권도 고단자 100여 명을 모집했다. 영등포의 한도장에서 그들을 모아 오디션을 보고 30여 명을 선발했는데, 예상했던 대로 유단자인 그들은 액션은 좋았으나 연기와 비주얼을 만족시키는 주연감은 없었다.고민하던 차에 그가 태권도를 잘하는 주연배우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한지인이 마침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태권도대회에 출전한 재미교포 청년을소개해주었다. 그의 골격, 특히 긴 다리는 바로 감독이 찾던 조건과 부합되어 두말않고 캐스팅했는데 22세의 그의 얼굴이 너무 동안이라 충무로호텔에 그를 투숙 시키고, 분장사를 동원해 얼굴에 수염을 이리저리 붙여보고 그려보니 그런대로 성숙하고 거친 얼굴로 바뀌었다. 그와 함께 앞서 선발한 30여 명의 태권배우를 모아 속성으로 연기교육을 시켰다. 그리고 액션영화에는 대량 소비될 수밖에 없는, 당시 무척 귀하던 컬러필름을 효과적으로 절감하기 위해 필름 한 프레임을 반으로 나눠 찍는, 이른바 ‘테크니스코프’ 촬영을 시작했다. 그 영화가 바로 <용호대련>(1974)이다.
개봉 첫날, 좀처럼 개봉 일에 극장을 찾지 않아 냉정한 감독이라는 소리를 듣던그였지만 이 영화에 대한 관객의 반응이 궁금해 허리우드극장에 들어가 영화상영 내내 관객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영화 도중 사방에서 “아! 발이 손보다 빠르군!” “그래! 저게 바로 태권도 파워야!”하며 후련해하는 것을 보고 비로소 안심했다. 며칠 뒤부터 “다리로 따귀를 치는 영화”라는 입소문이 돌아 점점 관객이 증가했고, 전국적으로 청소년들이 태권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영화는 대성공이었다. 당시 허리우드극장에서 4만 4000여 명의 관객 동원을 기록한 것이다. 이후 지방 흥행업자들 사이에서도 태권영화에대한 반응이 무척 좋았고,다음 해에는 동남아 국가들도 그의 태권영화를 원해 한 해에 몇 편의 태권영화를 만든 적도 있다. 그 후 다른 제작사나 감독들에 의해 태권영화가 무수히 만들어졌다. 한때 <옹호대련>의 주연배우 한용철(차리 셸)의 작품당 출연료가 2000만 원(당시의 톱스타는 500만 원)까지 치솟아, 결국 다른 제작사에서 스카우트해갈 정도가 되었다. 그가 떠난 후 합동영화사와 이두용 감독은 국내외 흥행사들의 주문으로 합기도 유단자 강대희를 새롭게 발굴해<무장해제>(1975)를 만들었는데, 미국 흥행사까지 작품을 수입해 가 미국에서 개봉하고 강대희마저 데려가 데이빗 강이라고 개명을 시켜 액션영화를 만든다.그 후 이두용 감독은 다시 검을 잘 다루는 현길수를 등장시켜 <사생결단>(1975), <비밀객(속)>(1976) 등의 작품을 만들었다.
다양한 장르와 묵직한 주제로 작가적 스펙트럼을 넓히다
그렇게 한국식 무술영화를 시작한 이두용 감독이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 에게 회의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7년간 15편의 태권영화를 만들어 ‘이두용 표’ 액션영화는 전국적으로 고정관객층도 확보하고 있었고, 동남아와 미주 까지 수출되는 쾌거를 이루었지만 정작 자신이 보기에 그의 작품들은 (그의 표현에 의하면)‘영양실조에 걸린’ 작품들뿐이었다. 당시 그가 만든 액션영화 의 평균 제작비는 홍콩 무술영화의 10분의 1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 적은 액수마저 당시 우리 영화사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 어섰기 때문에 이미 한계에 와 있었다. 홍콩은 다른 장르에 비해 액션에 과감한 투자를 했고 우리 영화계는 액션영화와 다른 장르의 영화를 동일하게 바라보았기 때문에 액션영화의 완성도를 위해 많은 자본을 투입하지 않았다. 회의에 빠진 이두용 감독을 더화나게 하는 것은 액션영화에 대한 영화계의 반응이었다. 당시 영화계에서는 특수 기능을 보유한 태권배우를 ‘으악새’라고 불렀다. 결투 장면 때 “악! 으악~” 비명과 기합을지른다 해서 조롱하는 차원에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더불어 이두용 감독의 멘토 역할을 하던 평론가이자 프로듀서마저 그를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그런 저급한 영화하지 말고 이런 예술영화나 해”하며 다른 장르의작품을 만들 것을 권유했다. 환경이 뒷받침해주지 않고, 그가 의지하는 주위사람들의 반응이 이렇다보니 그는 더 이상 완성도 낮은 작품을 만들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미국 에서 올 로케이션 예정이었던 <아메리카 방문객>(1976)을 끝으로 태권영화 연출을 접기로 마음먹는다.
미국에서 돌아온 이두용 감독은 합동영화사와 <초분>(1977), <생사의 고백>(1978), <경찰관>(1978), <물도리동>(1979) 등을 작업했고1979년부터 세경영화사에서 김성종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최후의 증인>(1980)을 제작하게 된다. 사실 그는 당시만 해도 원작소설 을 영화화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아 데뷔후 한 작품도 만들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최후의 증인>은 달랐다. 5권에 달하는장편 안에는 6・25전쟁의 상흔이 미스터리 형식으로 잘 기술되어 있었다. 평소 6・25전쟁을 제대로 다뤄보고 싶었던 이두용 감독은 김성종 작가의 전쟁을 보는 시각에 동의하면서 영화촬영에 매진했다. 회사의 과감한 투자, 하명중 주연배우와 정일성 촬영감독의 장기간의 촬영 협조로 1년여에 걸친 촬영을 마치고 개봉을 기다렸다. 하지만 검열 과정에서 영화계누군가가 이 작품을 ‘빨갱이 영화’라고 고발하 는 바람에 사상을 의심받은 제작사 대표와 이두용 감독은 공안부에 불려가 취조를 받았다.그리고 작품은 형편없이 가위질을 당해 156분짜리 영화가 100분도 채 안 되는 길이로 상영되면서 영화를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굳어진 마음으로 회사 대표와 기획실장과 함께 울분을 삭이던 중 당시 기획실장이던 대표의 아들로부터 오기로라도 한 번더 작품을 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곧바로 <최후의 증인>을 각색한 윤삼육 작가를 만나 “이번엔 사상성이나 사회성이 전혀 안 보이는 작품을 하자”고 논의한 뒤 샤머니즘을 응용한 미스터리 시대극 <피막>(1980)을 만들었다. <피막>으로 이두용 감독은 제17회 한국연극영화예술상에서 감독상을 받았고 대종상에서 주연배우 남궁원이 남우주연상을 받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어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ISDAP 상을 받는다. ISDAP란, 이탈리아 사회 각층의 명사, 대법원장이나 경제연합회장 같은 단체장들의 모임 명칭 이니셜인데, 베니스 영화제에 출품된 경쟁・비경쟁 작품 중 우수한 작품을 만든 감독에게 주는 상으로 그해에는(1981) 이두용 감독을 포함해 6명이 수상하게 된다.
이두용 감독은 사실 국내 팬들에게 <분노의 왼발>과 <용호대련> 등 주로 액션영화 감독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1969년 <잃어버린 면사포>로 데뷔한 이래 액션과 토속 시대극, 그리고 사회성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발군의 기량을 발휘한 감독이다. 지금까지 이두용 감독의 입을 통해 그의 데뷔 시절부터 흥행감독으로 발돋움한 1980년대 초반까지를 살펴보았다. 이후 글을 통 해 ‘다양한 얼굴’의 이두용 감독을 만나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