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아이, 유전의 작가 -히로시 시미즈
하스미 시게히코는 그의 오즈론을 시작하며 오즈 야스지로에 대해 누구나 알고 있다고 썼다. 히로시 시미즈에 대해서라면 이렇게 말하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그에 대해서 누구도 거의 알고 있지 않다고. 오즈의 맹우이자 1930년대 일본영화가 도달한 모더니즘의 정점을 보여주는 이 작가는 오랫동안 잊혀왔다. 히로시 시미즈는 너무 일찍 왔거나, 혹은 너무 적절한 타이밍에 도착한 ‘모더니스트’였다. 그러니까 이 시간의 오차는 정확히 두 가지로 양분된 의미에서 그러하다. 전후 유럽의 모더니즘 영화들을 선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한편으로 1930년대 제국의 중심부에서 꽃피웠던 도시 모더니즘이라는 의미에서.
풍경과 시선으로 모더니즘에 도전하다
1922년 쇼치쿠에 입사한(그로부터 1년 후 오즈가 입사했고, 이 둘은 영화적 동지로서 평생 친교를 쌓아갔다) 히로시 시미즈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30년의 <연애 제1과>부터였다. 도회적 유머 감각으로 충만한 이 연애희극은 무르익기 시작하는 쇼치쿠 소시민 영화의 전형을 보여주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오즈가 그러했던 것처럼 시미즈 또한 미국영화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에른스트 루비치와 프랭크 캐플러는 그가 사랑해 마지않던 감독들이었다. 1933년의 <대학 도련님>의 기록적인 히트와 연이은 시리즈의 대성공은 그를 일약 쇼치쿠의 간판스타로 등극시켰다. 대학 스포츠 클럽이라는 ‘모던’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해럴드 로이드 풍의 도시적 유머 감각과 도쿄 시타마치 풍경의 절묘한 조화는 전혀 새로운 감각의 일본영화를 만들어냈다. 이 시리즈가 끝나갈 무렵 시미즈는 그의 영화 경력에서 가장 중요한 두 편의 영화 <아리가토 상>(1936)과 <바람 속의 아이>(1937)를 완성한다. 그리고 이 두 편의 영화 사이에 (정확히는 <바람 속의 아이>의 촬영 지연 덕택에) 그의 영화적 스타일의 전시장이라고 할 만한 <스타 플레이어>(1937)를 만들었다. 시미즈는 로케이션을 사랑했고, 연기를 혐오했다. 그는 그 장소의 바람과 공기를 고스란히 옮겨오는 것, 로케이션 촬영이야말로 문학이나 무대극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연기 없이 영화가 하나의 흐름을 가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영화가 ‘시’와 같은 것이 될 수 있는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오즈가 실내의 구도 속에서 그만의 모더니즘을 완성했다면, 시미즈는 풍경과 시선이라는 문제로 모더니즘의 기획에 도전했다. 그가 아이들을 자신 영화의 주인공으로 즐겨 삼은 것은 그들의 연약함과 순진함, 그리고 변덕 속에서 비롯되는 예측불허야말로 그가 생각하는 연기 없는 영화의 흐름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바람 속의 아이>가 후자를 대표한다면 <아리가토 상>은 전자가 고스란히 응축되어 있는 영화다.
풍경에 스미는 절묘한 서사
<아리가토 상>은 정말로 필견 영화다(이 영화는 마침 영상자료원에서 상영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짧은 장편(掌篇)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에서 히로시 시미즈 는 이즈 남부의 풍광 속으로 들어가 오로지 이 풍광에서만 가능한 서사 속으로 침잠해들어간다. 시모다로부터 미시마 사이의 산길을 달리는 버스, 외통수의 이 길을 종종 소달구지가, 말이, 하굣길의 한 무리 아이들이, 지게를 진 농부가 막고 있다. 그들도 그들의 길을 가는 중이니, 길을 비켜달라고 하는 건 여간 미안한 일이 아니다. 버스 운전수는 매번 “아리가토(고맙습니다)”라고 외치며 답례를 잊지 않는다. 소녀는 도쿄의 공장으로 떠나기 위해 버스에 몸을 싣고, 금광에 손을 댄 어떤 이는 벌써 두 딸을 팔아먹었다. 한 번도 이 버스를 타보지 못한 산골 소녀들은 운전수에게 돌아오는 길에 새 레코드판을 사다달라고 부탁한다. 고갯길을 넘을 때마다 아리가토 상에게 부탁과 전언이 하나씩 늘어난다. 그런데 어쩌면 이 모든 이야기는 부질없는 것인지 모른다. 인물들과 그들이 품은 사연들은 달려가는 버스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다.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우연히 이 버스에 오른 누군가가 지켜보는 남부 이즈의 풍경이며, 인물들은 그저 풍경의 일부일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나는 한 무리의 조선인. 이 험한 산길을 뚫은 조선인 노무자들은 단 한 번도 자신들이 만들어낸 이 길을 달려보지 못한 채 또 어디론가 새로운 길을 뚫기 위해 떠난다.
일본영화가 도달했던 최상의 순간
전전의 일본영화에서(일본영화의 국적을 부여받은 조선영화가 아닌 일본 ‘내지’영화에서) 조선인의 형상과 마주한다는 것은 매우 드문 경험이다. 식민지인들이란 거의 대부분 표상 영역의 저 바깥으로 추방된 자들에 불과할 터. 히로시시미즈는 이 드문 경험을 제공해주는 거의 유일한 작가이기도 하다. 미국영화와 풍경을 사랑했던 이 모던한 작가가 일본 내지를 벗어나 실제로 가볼 수 있었던 장소가 정확히 대동아공영권과 겹친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일 것이다. 중일전쟁 직후의 국책영화 <대륙의 무지개>(1938)를 위해 처음 중국을 향한 그는 1940년 <경성>을 촬영하기 위해 조선에 왔다(조선 땅의 풍광은 시미즈를 자극했으며 그는 즉흥적으로 조선인 소년과 일본인 소년의 우정을 다룬 <친구>를 연이어 완성했다). 그리고 대만총독부의 황군 선전영화 <사용의 종>을 찍기 위해 대만으로 향했다. 그는 이 각각의 토지에 매혹당했으며, 풍경과 그 일부로서 조선인과 고산족을 카메라에 담기를 열렬히 원했다. 그리고 (그로서는 매우 당연히도) 반식민지인 혹은 식민지인으로서의 그들의 존재방식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아마도 히로시 시미즈의 영화를 보는 것은 전전의 일본영화가 도달했던 최상의 순간을 맛보는 것일 게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최상의 영화 예술가조차 시대 속에 놓인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할 것이다.
by.이영재(성균관대 비교문화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