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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화]정창화 감독과 아시아 합작영화의 시대
정창화 감독이 홍콩 카이탁(啟德) 국제공항에 처음 도착한 1967년 12월 27일, 아시아 영화산업에는 큰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홍콩은 바로 그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탄탄한 스튜디오 시스템을 갖추고 호황을 누리던 일본 영화산업이 관객층의 변화와 TV의 등장에 대처하지 못하고 사양길로 접어들자 란란쇼(邵逸夫)가 이끄는 쇼브라더스(邵氏兄弟有限公司) 스튜디오는 아시아 전역을 강타한 호금전(胡金铨)의 <방랑의 검객>(1966)과 장철(張徹)의 <외팔이>(1967)를 통해 바야흐로 화교문화권 영화산업의 메카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홍콩 청수만(清水湾)에 위치한 초대형 영화제작소인 ‘무비타운’에서는 일본, 인도네시아, 필리핀, 대만 등지에서 스카우트되어 온 수 십 명의 감독과 배우들이 영화제작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었다.
정창화 감독을 반갑게 맞이한 란란쇼는 이제 막 짐을 푼 정창화 감독에게 <천면마녀>(1969)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액션영화 시나리오를 내밀었고, 이미 홍콩으로 건너와 자리를 잡고 있던 한국 배우들인 남석훈과 성훈, 그리고 한국에서 따라온 두 명의 조감독과 함께 정창화 감독은 아시아에서 가장 높았던 홍콩의 마천루를 종횡무진 누비는 액션영화를 순식간에 완성했다. 쇼브라더스 A급 스타인 티나 친페이(金霏)를 고층빌딩 꼭대기에 실제로 매달리게 하여 란란쇼를 깜짝 놀라게 했던 <천면마녀>는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기대 이상의 좋은 반응을 얻었고, 정창화 감독은 이후 1973년에 골든 하베스트로 이적하기 전까지 쇼 브라더스를 대표하는 감독들 중 한 명으로 <아랑곡의 혈투>(1970)와 <죽음의 다섯 손가락>(1972)을 비롯한 여섯 편의 장르영화를, 그리고 골든 하베스트에서는 1977년에 <파계>를 끝으로 한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다섯 편을 연출했다.
쇼브라더스와 아시아 합작영화
1960년대 중반에서 70년대 중반에 이르는 10여 년의 기간은 아시아 지역 내에서 홍콩 영화산업의 위치가 최정점에 달했던 시기다. 그리고 이 시기 홍콩 영화산업은 상하이 출신의 화교재벌 소씨(邵氏) 가문이 설립한 쇼브라더스가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었다. 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쇼브라더스와 함께 동남아시아 지역 화교 영화시장을 양분하며 경쟁을 벌이던 MP&GI는 1964년 타이페이에서 개최된 아세아영화제에서 발생한 비운의 헬기 사고로 그룹의 후계자인 록완토(陆运涛)를 비롯해 영화사업을 이끌던 참모들이 한꺼번에 사망한 후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화교기업이 그랬듯이 상하이 출신인 소씨 가문도 부동산 사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따라서 1950년대 말까지만 해도 쇼브라더스에 영화제작은 소유하고 있는 100개가 넘는 극장체인에 공급할 상품으로만 인식되고 있었다. 하지만 막내인 란란은 형들과 달랐다. 형들이 제작하던 싸구려 영화들에 만족할 수 없었던 그는 영화제작본부를 말레이시아에서 홍콩으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무비타운’공사에 들어간다.
1966년에 ‘무비타운’이 본격적인 가동을 시작하자 란란쇼에게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인력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었다. 지속적인 사업확장으로 홍콩,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대만, 그리고 심지어 런던, 샌프란시스코, 밴쿠버, 뉴욕의 차이나 타운에 150여 개의 극장과 놀이공원, 식당체인을 소유하게 되었지만 이들 극장 망에 배급할 영화들이 턱없이 부족해진 것이다. 1년에 적어도 50~60편의 자사 영화를 제작해야 하지만 고급인력, 즉 감독과 배우가 그 규모를 맞출 수 없었던 것이다. 대만으로 떠나간 간판스타였던 이한상(李翰祥)감독을 이어갈 사극과 멜로드라마 전문 감독이 나타나지 않았고, 그리고 1년 내내 더운 동남아시아 지역 관객의 특성상 액션과 코미디 영화를 많이 제작해야만 하는데 이런 장기를 가진 본토 출신 감독의 수가 모자랐던 것이다. 따라서 란란쇼는 중화권을 벗어난 인재 스카우트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사실 쇼브라더스는 1960년대 초에도 아세아 영화제 네트워크를 통해서 한국과 대만의 영화 제작자들과 합작영화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특히 사극 전문 감독인 이한상이 떠난 직후 한국의 신필름과 계약을 체결, <비운의 여왕 달기(妲己)>(1964)를 합작 형태로 제작하고 대만의 중앙전영과는 <양귀비> <진시황>을 이어서 제작했다. 하지만 이들 영화는 쇼브라더스의 입장에서는 거두어들이는 이익에 비해서 제작과정이 너무 더디고 그리고 각국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1964년 이후 그 흐름이 거의 끊어지게 된다. 따라서 1966년 이후에 등장한 새로운 경향은 제작사 대 제작사, 국가 대 국가의 공동제작이 아니고 감독과 배우들을 스카우트해서 ‘무비타운’에서 제작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국제공동제작의 범위를 대단히 넓게 본다면 이들 영화가 합작으로써 이해될 수도 있겠지만 엄밀히 말한다면 해외 ‘용병’들을 기용해 제작된 100% 쇼브라더스 영화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런 흐름은 일본 닛카쓰 스튜디오의 간판급 장르영화 감독인 이노우에 우메쓰구(井上梅次)를 1966년 가을에 홍콩으로 불러오면서 본격화되었다. 쇼브라더스가 그에게 바란 것은 홍콩 영화산업이 취약한 장르영화들, 즉 007 스타일의 첩보영화, 섹스 코미디, 그리고 뮤지컬 영화들을 제작하기 위해서였다. 기대에 부응하듯 이노우에 우메쓰구는 홍콩에 도착하자마자 번개 같은 속도로 한 달 만에 두 편의 영화를 완성했고 이에 놀란 란란쇼는 추가로 나카히라 고(中平康)를 비롯한 세 명의 일본 감독을 더 홍콩으로 불러온다. 당시 영화산업 전체가 침체기에 접어들면서 생활고를 겪고 있던 스튜디오 소속 일본 감독들은 쇼브라더스의 초청을 일종의 수익성 높은 부업 정도로 생각했고 따라서 이들이 홍콩에서 만든 영화들은 자신들의 기존 일본영화들을 리메이크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일본 감독들 이외에도 1966년과 67년의 쇼브라더스에는 필리핀과 대만에서 온 영화인들도 많이 활동하고 있었다. 즉, 정창화 감독이 홍콩 땅을 밟은 1968년에 이르러서는 이들 ‘용병’들의 영화가 정착되어 매해 제작되는 만다린어 영화의 20~30%를 고정적으로 차지하고 있었다.
한홍합작과 정창화
쇼브라더스에서 정창화 감독에게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 것은 대만과 홍콩에 걸쳐 있던 중소 제작사인 옥련공사(玉聯影業公司)와 합작으로 제작되어 서울, 홍콩, 타이페이에서 로케로 촬영된 한국판 제임스 본드 스타일 첩보영화 <순간을 영원히>(1967)를 란란쇼가 보면서부터였다. 당시 지속적으로 첩보 액션영화 제작을 원하던 그는 이 영화를 자사의 배급망을 통해 <염첩신룔>라는 제목으로 1967년에 홍콩에서 개봉했고 이어 바로 정창화 감독과 계약을 맺게 된다. 란란쇼에게 한국시장은 여전히 정체가 파악되지 않는 미개척지였고 쇼브라더스 영화들이 한국 시장에 본격적인 진출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가 없었지만 일단 정창화 감독의 장기인 액션영화들이 아시아 영화시장에서 일정 수익 이상을 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홍콩영화계의 고질적인 문제인 남자배우 기근을 해소하기 위해 한국에서 스카우트해왔던 배우들(성훈, 남석훈, 임지운 등)을 제대로 활용할 수도 있는 기회라고도 생각한 것이다. 정창화 감독은 <천면마녀>가 호평을 받으며 홍콩에서의 경력을 산뜻하게 시작하게 되며 곧바로 외국인 용병들에게 웬만해서는 자리를 내주지 않던 무협영화로 정면승부를 시도한다. 그 결과물인 <아랑곡의 혈투>가 그해 홍콩 연말 흥행 10위 안에 드는 대성공을 거두면서 정창화 감독은 쇼 브라더스의 대표적인 장르영화 감독 중 한 명으로 안정적인 자리를 확보하게 된다.
정창화 감독이 1968년부터 1973년까지 쇼브라더스에서 감독한 영화들 중 대부분은 합작영화의 형태로 한국에서도 개봉이 되었다. 하지만 이들 영화는 영화사적으로 볼 때 분명 쇼브라더스 스튜디오가 제작하고 배급한 영화로 파악해야만 한다. 당시 쇼브라더스와 거의 독점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신필름은 제작편수를 확보하고 외국영화 상영을 위한 쿼터 확보를 위한 방편으로 67년부터 트레이닝을 받고 있던 신필름 3기 전속배우들 대부분을 홍콩으로 보내 쇼브라더스의 영화에 출연 하도록 했다. 진봉진, 김기주, 홍성중을 비롯한 배우들은 1971년부터 1975년 신필름이 문을 닫을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홍콩에 머물면서 쇼브라더스 영화에 조연급으로 출연해왔는데, 신필름은 이들의 존재와 정창화 감독, 그리고 1972년에 홍콩에서 1년여간 영화를 연출한 장일호 감독과 정창화 감독을 이용해 합작영화의 기본요건을 갖춘 후 ‘합작영화’ 타이틀을 걸고 개봉했다.
홍콩을 시작으로 워너브러더스의 배급망을 통해 전미 흥행 1위에까지 올랐던 <죽음의 다섯 손가락>이 대표적인 경우로, 한국에서는 <철권>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다. 반면에 정창화 감독이 란란쇼의 오른팔이었던 레이몬드 초우가 독립해서 세운 영화사 골든 하베스트(嘉禾電影有限公司)로 이적하면서부터 제작된 영화들 중 상당수는 합작영화로 파악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거대기업인 쇼브라더스와는 달리 아직은 신생 독립영화제작사와도 같았던 골든 하베스트는 감독들에게 좋은 대우를 해주기는 했지만 촬영 스튜디오가 빈약해 대부분 로케이션 촬영을 해야 했고 또한 해외합작을 통해서 제작비를 절감하는 것에 적극적이었다.1) 따라서 많은 영화가 한국에서 로케이션 촬영되었고 정창화 감독이 직접 연출하지 않은 영화들 역시 한국과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중개되기도 했다. 골든 하베스트의 수장 레이몬드 초우는 사실 쇼브라더스에 있었을 때도 아시아 국가들과의 합작을 대부분 지휘했던 인물로서 타고난 국제감각이 있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골든 하베스트에서 진행한 합작 역시 60년대 초에 쇼브라더스에서 진행했듯이 해외 로케촬영에서 발생하는 비용은 해당 국가에서 감당하고 대신 독점적 배급권리를 가져가도록 하는 방식을 적용했다. 이런 방식으로 제작된 정창화 감독의 합작영화들은 첫 번째 시도였던 우진 영화사와의 합작 <흑야괴객>(1973)을 비롯해 총 5편이 해당된다.
정창화 감독은 1977년, 아마도 골든 하베스트에서 연출한 그의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남을 <파계>를 끝으로 10여 년 간의 홍콩 연출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게 된다. 2003년에 홍콩 영상자료원과 한 인터뷰에 의하면 당시 문화공보부장관의 권유에 의한 결심이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한국 정부에서는 신상옥 감독이 60년대에 담당했던 역할을 정창화 감독이 이어받기를 원했던지도 모르겠다.2)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후 서울에 화풍영화사를 설립한 정창화 감독의 영화적 행보는 실망스러웠으며 이후 오랫동안 정창화 감독은 한국과 홍콩 그 어느 쪽의 공식 영화사에서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채 기억 속에서 잊혀갔다.
내셔널 영화사와 정창화 감독
흥미롭게도 대부분의 홍콩영화사 연구에서는 1968년 이전의 정창화가, 그리고 한국영화사에서는 1967년 이후의 정창화가 사라져 있다. 홍콩 영화비평계의 원로인 로우 카(羅卡)는 정창화 감독이 홍콩 영화사 서술에서 빠져 있는 이유를 “그 어느 연구자도 정창화 감독의 존재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홍콩영상자료원의 웡 아이링(黄爱玲)은 “1997년 홍콩 반환 이후 오히려 더 ‘홍콩영화’의 정체성에 대한 절실함이 강해지면서 홍콩의 상징적 장르인 무협영화에 참여한 한국과 일본 감독들의 존재가 불편해졌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을 내놓았다.3) 이는 비단 정창화 감독만의 문제는 아니다. 즉, 초국가적인 영화활동을 했던 영화인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시련이기도 했다. 일국사적인 관점에서 서술되어 왔던 내셔널 시네마 연구의 전통에서 본다면 정창화 감독같이 한 국가 영화사의 흐름에서 파악하기 힘든 감독들은 손쉽게 무시되거나 연구를 수행할 마땅한 방법론이 부재한다는 이유로, 혹은 두 개 이상의 내셔널 시네마를 비교하며 연구되어야 하는 프로젝트의 무게감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다. 하지만 다행히도 최근 들어 아시아 각국의 영화인들이 트랜스내셔널 영화사의 관점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홍콩 중문대학의 키니아 야우(邱淑婷)는 홍콩과 일본의 영화 교류 사 연구를 통해 이노우에 우메쓰구와 나카히라 고를 비롯한 일본 감독들의 홍콩 활동 상황을 상세히 밝혔고 정창화 감독의 경우에는 2000년에 홍콩 국제 영화제에서 마련한 특별전을 통해 처음 본격적으로 주목받게 되었다.4) 그리고 이어진 부산영화제에서의 한홍합작영화 특별전과 그에 정창화 감독 회고전은 한국영화 연구자들에게 정창화 감독 연구의 불을 댕긴 도화선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정창화 감독은, 특히 그의 10년 여에 걸친 홍콩에서의 영화 경력에 대해서는 뚜렷한 연구결과물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상자료원의 정창화 감독 회고전이 내셔널 시네마의 한계를 넘어선 한국영화사 연구의 새로운 전기를 이루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
주)
1. 1971년에 출범한 골든 하베스트는 이미 제작을 중단한 MP&GI (캐세이 영화사) 의 촬영소를 인수하여 영화제작을 시작했다. 정창화, 황풍, 로 웨이 등 쇼 부라더스의 스타감독들을 많이 스카우트해왔지만 초기에는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쇼 부라더스의 거절로 레이몬드 챠우를 찾아온 브루스 리의 <당산대형> (1972)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본궤도에 올라서게 된다.
2. 홍콩영상자료원은 2003년 12월 2일에 영화사연구가 Sam Ho (何思穎)의 진행으로 정창화 감독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口述歷史訪問: 鄭昌和 (香港 : 香港電影資料館, 2003).
3. 필자는 2008년 8월 15일에 사이완호에 있는 홍콩영상자료원에서 로우 카, 웡 아인링과 함께 정창화 감독과 한홍합작영화에 관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4. Kinnia Yau Shuk-ting, Japanese and Hong Kong Film Industries (Routledge: London and New York, 2010); Kinnia Yau Shuk-ting, “The Early Development of East Asian Cinema in a Regional Context,” Asian Studies Review 33.2 (June 2009): 161-173.
by.
이상준(미시간대학교 영화과 연구원)